【L.O.H】- 쪼가리 하나 ♧:1920'S(소설):♣

나갔다 올게요.

강현은 그 한 마디만 내던지고 호텔을 나가버렸다.

“이 아저씨는 또 어딜 간 거래. 참.”

투덜댄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올 리는 만무했다. 아니, 어쩌면 딱히 뾰족한 수가 없으니 투덜거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쿠다다당! 쾅!

“꺗!”

막 호텔을 빠져나온 박화원의 앞으로, 웬 손수레 한 대가 엄청난 기세로 지나가버렸다. 사과는커녕 뒤도 안 돌아보고 엄청난 기세로 달려 나가는 수레의 짐칸에는 지폐다발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저런 속도로 달리다가는 못 해도 서너 다발 정도는 땅에 흘리고 말 텐데, 수레 주인은 그런 것쯤은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었다.

“뭐 이런 동네가 다 있담.”

좌우를 살피며 길을 건너던 박화원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지더니, 급기야는 도로를 다 건너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서버리고 말았다.

이런 도시는 난생 처음이었다.

판이 둥글넓적한 경성이나 나하에서 20년이 넘게 살아온 박화원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원해제도나 동아시아 여기저기를 가보긴 했지만, 이곳들 역시 대부분 평야에 넓게 퍼진 도시들이었다.

그런데 이 도시는 남북으로 길쭉했다. 길가에 걸린 지도를 보아하니 시가지의 동서 폭은 채 1km도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중간에 구불구불한 강까지 흐르고 있었다. 강현을 찾는다고 남쪽이나 북쪽, 둘 중 하나를 잘못 택해 돌아다니다간 아무 소득도 없이 시내 구경만 실컷 할 판이었다.

한국영사관이 있다면 영사관을 통해 해적 윗도리 같은 옷 입고 싸돌아다니는 동양인 하나 잡아달라고 현지 경찰에게 부탁 할 수라도 있다. 하지만 독일 전역에 한국영사관은 고작 베를린과 함부르크, 두 곳에 불과하니 함부르크에서만 직선으로 95km나 떨어져 있는 이런 지방도시에서 박화원이 딱히 도움을 청할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독일어가 유창하지도 않았다. 한국 외교계에서 독일어 배워 출세할 길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지방도시라고 해도, 엄연히 함부르크보다도 거대한 항구였지만.

“어디로 갔을까요?”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박화원은 역시 혼잣말을 하면서 뒤로 돌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혹시 바다라도 구경하러 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원양어선 탔다는 사람이 도버해협을 건넌 이후로 그 바다를 보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뮌헨에서 바로 베를린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굳이 브레머하펜을 경유하자고 주장한 것은 분명 강현이었다. 다른 도시도 아니고, 독일 제1의 항구도시라고 하지 않는가.

“몰라.”

파리에서도 그랬고, 뮌헨에서도 그랬다. 도대체가 자신만 버려두고 어디 사라지는 데는 도가 튼 인간이었다. 파리에서야 나름 생일선물을 준비해준다고 분주히 뛰어다녔으니 봐 준다 해도, 뮌헨에선 맥주만 한 가득 퍼마신 채 웬 정신 나간 콧수염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만 주절주절 늘어놓았으니 어떻게 생각을 해도 용서를 할 가치를 찾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똑같이 해 보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버렸다.

“어디로 갈까요.”

걷기 시작했다.

모자를 벗자,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아시아에서도, 유럽에서도, 바닷바람의 냄새는 똑같았다.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은 채, 계속 걸었다.

강현도, 이 바람을 맞고 있을까.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심지어 소뷔르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똑같은 것을 독일의 작은 항구마을에서까지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가?”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박화원은 소블렘에서 산 둥근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었다.

모자가 문제는 아니었다. 이래봬도 파리에서 점찍어 둔 걸 소블렘의 샤를 드 지레 역 광장에 나오자마자 집어든 거니까. 파리에서 유행하는 모자가 독일에서 우스꽝스러울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머리. 마을 어디에서든 여자들은 머리를 땋아서 올려 묶거나 단발로 잘랐지, 길게 기른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박화원의 머리는 나하에 있을 때에도 뭇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을 정도로 길었다. 아, 생각해보니 나하의 여자들도 대부분 머리를 단발로 자르거나 틀어 올리고 다녔다. 후자는 보통 일본인들이었지만.

머리가 어깨 정도까지 자랐을 땐 그냥 끈으로 묶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유럽에 도착한 이래 그녀의 머리는 벌써 허리까지 자랐다. 경성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비녀라도 꽂고 다닐까 싶었지만, 유럽대륙 한복판에서 비녀를 구할 도리가 없었다. 비녀는커녕 나무젓가락도 1달 째 구경 못 한 판국에.

-후위이이잉!

“큭!”

바다를 등지고 걸어가고 있는데도, 간간이 거센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모자를 낼름 집어가려 했다. 안 그래도 꾹 눌러쓴 모자를 박화원은 몇 번이나 손으로 눌러야 했다. 아직 1월 말, 어느 대륙이든 간에 겨울 바닷바람은 매서웠다.

“응?”

바람에 정신없이 시달리며 걷다가 간신히 고개를 드니, 웬 광장이 넓게 펼쳐져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유럽에서 광장 보는 것이 그리 신기할 것은 없었지만.

-꽤애액! 꽤액!

“큭!”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괴성을 내며, 기관차 한 대가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모자를 들어 올려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녀는 어느새 브레머하펜역 앞에 닿아 있었다.

분명 역 앞이어야 하는데.

열차가 지나다니고 플랫폼이 있고 광장이 있다면 분명히 역전일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역 건물은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분명 대전쟁 기간 중에 독일 영내에선 이렇다 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는데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각종 잡동사니를 실은 수레들이 분주히 오가는 광장 안으로 들어섰다.

“오메, 오메메메 저 도둑놈! 일루 와 이 도둑놈아! 어디 훔쳐갈 게 없어서 그걸 훔쳐가!”

등 뒤에서 항아리라도 깰 듯한 고함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웬 남자가 수레를 끌고 허겁지겁 달려가는 가운데 한 아낙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질펀하게 욕을 퍼붓고 있었다. 수레에는 수백 다발의 지폐가 위태롭게 쌓여 줄줄이 도로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수레를 훔쳐가는 남자는 돈다발엔 별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아까 호텔 앞에서도 봤던 풍경이었다.

“휴우…….”

왠지 겁이 난다고나 할까.

-달걀 1개 - 500마르크

뭔가 못 볼 것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빵 1개 - 700마르크

말도 안 된다.

분명히 뮌헨에서 빵 한 개를 500마르크에 팔고 있었다.

고작 이틀 만에 빵 값이 200마르크나 뛰었다는 말일까? 아무리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같은 독일인데?

아니, 독일에서 노천시장이란 것을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하던 차였다.

“음, 흠흠!”

빵 파는 아주머니에게 이틀 전 가격이 얼마였는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도통 문장이 떠오르질 않아 헛기침만 두어 번 하다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적성국이었던 독일 사람들이다. 영불해협 해전 이후로는 독일 연안에까지 한국 수군 순양함이 들어와 무력시위를 벌였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있었다. 사실은 동양인이 이렇게 겁도 없이 독일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도 괜찮나 하는 생각마저 드는 판국이었다. 강현이야 건장한데다가 바다에서 몇 년을 싸운 군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박화원 자신은 닭 모가지도 비틀어 본 적이 없었다.

“이 아저씨, 정말 어딜 간 거야!”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곧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을 눈치 챈 박화원은 다시 모자를 푹 눌러써야 했다. 아, 해외여행이란 참으로 고달픈 노릇이었다. 아니, 명색이 외교관으로써 할 말은 아닌 듯하지만.

-아니, 어제까지 1파운드에 1,400마르크였잖아요!

-그럼 뭘 어떻게 하라고? 다른 집 가 봐, 2,000 마르크 넘어가는 곳도 있어. 싫으면 관 둬!

-참아, 참아.

시내에 상점가가 따로 있는데도 역 광장에 이런 암시장이 생긴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쯤 되면 차라리 물건을 가져와서 물물교환 하는 편이 훨씬 낫지 낳을까 싶은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웬 빈 병을 한가득 수레에 싣고 가게를 돌아다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대략 빈 병 열 개면 달걀 한 개, 버터 한 조각 정도 얻는 모양이었다.

이런 나라에선 아마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다. 대전쟁 이후 류큐가 인플레에 시달리고 있다고는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달걀 하나에 무려 세 자릿수 가격이라니,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어이, 아가씨. 달러 파쇼, 달러.”

“네, 넷?”

“100달러에 190만 마르크.”

“에에…….”

190만 마르크, 머리가 핑핑 도는 숫자다. 박화원의 머리가 도는 동시에, 시장 구석에서 암달러를 파는 상인들의 손가락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지갑에 들어있는 돈은 몇 장의 달러 아니면 마르크 금화들이었다. 아니, 애당초 하루가 다르게 폭락하는 마르크 지폐를 손에 쥔다는 것부터가 바보가 아닌 이상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한 100년 후에 경매에 부치려는 속셈이라면 또 모를까.

“어이, 아가씨! 비싸게 해 준다니까!”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리기까지 한 암달러상이 뒤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박화원은 눈 딱 감고 빠른 걸음으로 그 소리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왠지 등 뒤에서 자신을 잡으려고 달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십여 발짝 걸어 나가다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배에 힘을 한껏 주었다. 눈을 가능한 한 부릅떴다.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애꾸눈 암달러상은 이번엔 또 다른 외국인(옷차림새로는 그래보였다)을 붙잡고 열심히 꼬드기는 중이었다.

“하아…….”

모자를 들어 올리고 나자, 입에서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뭘 한 건지 기억이 흐릿했다.

뭔가 번쩍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기억이 흐릿하니 눈까지 흐릿해지나 싶어 오른손으로 눈을 비볐다.

광장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가판대에서는 여전히 뭔가가 번쩍거리고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찾는 손님은 없는 듯했다. 그냥 반짝이는 것도 아니었다.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순간 강현이 떠올랐다. 그 남자도 정복을 입으면 저런 쇳덩어리를 몇 개씩 주렁주렁 매달고 나타났다.

훈장.

“우와!”

엄청나게 많은 훈장과 휘장들이, 가판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가판대 위의 물건들이 확실히 눈에 보인 순간, 개수를 세어보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분류 따위는 없었다. 그냥 쌓아놓을 뿐이었다. 가격표조차 없었다.

“에, Entschuldigung(저기요)!”

“음?”

먼지떨이 하나 들고 모닥불을 피운 드럼통 옆에 한가롭게 앉아 있던 가게 주인은 박화원이 부르는 소리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 곳곳에 실로 꿰맨 자국이 나 있고, 왼쪽 손가락은 두 개가 없었다. 저절로 한 발이 뒤로 물러날 판이었다.

“Marine(수군), Marine, 에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라고는 영어와 불어 단어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경성에는 중국인이라면 절대로 손님으로 받지 않는 식당이나 가게가 있다. 독일 땅에서 영어나 불어로 말했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책에서 본 독일어 단어를 최대한 쥐어짜내야 했다.

“Marine(수군), Badge(배지). 아, 이게 아닌데."

원래는 휘장이나 훈장을 말하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떠오르는 단어라고는 배지 정도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독일에 머무는 동안에는 한국 외교관이라는 사실은 숨겨야 할 성 싶었다. 일본어는 유창하게 하는데, 일본인인 척 해버릴까.

“Das(그거)."

"Dies(이거요)?"

"Ja(응)."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독일 수군의 휘장이나 훈장 따위, 사 봐야 자신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물건이었다.

“Preis(가격)?”

긴 대화 같은 건 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 지금 내뱉는 단어들도, 솔직히 말하자면 영어 단어를 대충 독일어 느낌이 나게 발음하는 수준이었다. 혹시라도 독일어에는 없는 단어를 선택했다가는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주인은 대답은 안 해주고 그저 박화원을 물끄러미 쳐다 볼 뿐이었다. 왼쪽 눈가에 있는 수술 자국이 씰룩대는 것이 보였다. 울면서 쪼그려 앉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Haben sie einen Dollar(달러 있어요)?”

“예?”

아니, 독일 사람에게 한국어로 되물어봐야 무슨 소용일까. 머리를 긁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머리카락 몇 올은 빠지겠다.

“Dollar. Haben, sie, einen Dollar? Amerika Dollar!”

“Dollar? Ja. Ich habe Dollar!”

뭔가 빼먹었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대충 뜻은 통한 듯 했다. 고작 손바닥만 한 독일어 안내책자 보면서 3일간 공부한 것 치고는 괜찮은 것이라고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금화를 써 버리고 싶었지만, 이번엔 금화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았다.

"Ein Dollar(1달러)!"

“Ein? One?”

“Ja!”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다. 혹시 해서 손가락 하나를 펴서 내보였지만, 역시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호텔 입구에 걸려 있던 표에 1달러당 환율이 17,000마르크랬던가. 1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면 빵 수십 덩이 값이다. 자신에겐 싸도 가게 주인에겐 엄청난 값이다.

“내가 이걸 왜 고르는 거지?”

투덜대면서도, 장갑을 낀 박화원의 손은 열심히 훈장과 휘장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일일이 주인에게 물어보기도 미안한 일이니 그저 직감만 가지고 수군 것인지 아닌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왜 주인은 이렇게 많은 훈장을 분류조차 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일까. 훈장을 고르는 박화원의 양 볼에 공기가 빵빵하게 들어갔다.

그 다음에, 다른 의문이 생겼다.

누가 이렇게 많은 훈장을 팔았을까.

“아!”

하마터면 들고 있던 휘장을 놓칠 뻔 했다.

인구가 10만 밖에 안 되는 이 조그만 도시에서, 누가 이렇게 많은 훈장을 내다 팔 수 있을까.

멍해졌다.

가판대가 멀어 보인다. 점점 멀어져간다. 멀어지는 가판대를 붙잡으려고 팔을 휘둘렀다.

“아! 쓰으으…….”

장갑 없이 맨 손이었다면, 팔을 휘두르다가 손가락을 가판대 모서리에 부딪쳐 피를 봤을 것이다. 아픈 오른쪽 둘째손가락을 부여잡은 채, 박화원은 멍하니 훈장더미를 쳐다보았다.

애초에 파는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뭐에 쓰려던 것일까?

“저기, 물건 사세요?”

“뭔데?”

머리를 곱게 땋아서 둥글게 올린 독일인 소녀가 가게에 들어왔다.

손에 은빛 휘장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자신이 처음 말을 걸었을 때 처럼.

“경순양함 휘장인데…….”

“일단, 달아 봐.”

확실하진 않지만, 분명 ‘달아라’라는 말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주인이 꺼내든 것은 눈금접시였다.

담배를 꺼내 문 가게 주인은, 저울의 한 쪽 접시 위에 소녀가 가져 온 휘장을 올려놓고, 다른 한 쪽에 납으로 만든 추를 하나씩 올려놓기 시작했다.

이 가게,

“고철가게?”

입에서 그 한 마디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어디보자……. 400g? 그럼 한 2천 마르크나 되겠군.”

“네? 2천 마르크요?”

소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가판대 앞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엿듣던 박화원의 입도 그에 못지않게 벌어졌다. 고작 고기 한 덩어리 값이다.

“저기 쌓인 것 좀 봐. 지금 훈장들도 저렇게 쌓여 있는데, 고작 휘장이 얼마나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훈장이면 한 2백 마르크는 더 줄 수 있을까.”

“세, 세…….”

울려 하고 있었다.

소녀가 휘장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박화원도 손을 꼭 쥐어버렸다.

팔지 마.

소리는 내지 못한 채, 입만 뻥긋댔다.

그대로 돌아가.

자신이 너무나 바보 같아서, 차라리 울어버리고 싶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 받아 온 훈장을 고작 고철 값에 팔아넘겨야 했던 사람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걸 단 돈 1달러에 살 수 있다고 좋아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헐값에 산 훈장을 선물로 받은 무관 아저씨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이대로는 다시 그 얼굴 볼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발.

“나중에, 다시 올게요.”

“생각나면 와. 그 땐 또 얼마나 될라는지. 에고, 참 나.”

소녀를 돌려보내면서도, 주인은 그저 답답하다는 투로 혀만 찰뿐이었다.

주인 역시 답답한 것이다.

“거기, 동양인 아가씨.”

“네?”

그거, 고철이야 고철.

우리한텐 아무 소용도 없는 물건들이야.

좋겠수.

가게 주인이 뭐라고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혹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인의 손가락 끝은 비틀거리며 멀어져가는 소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따라가봐요.”

“네?”

“뭐, 신경 쓰이는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참!”

알고는 있었지만,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대로 엉거주춤 인사를 해 버렸다. 빵가게를 그냥 지나쳐가는 소녀가 보였다.

치마는 그리 길지 않다. 뛰는 데 문제는 없다. 구두도 그리 높지는 않았다.

다만, 붙잡을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1마르크 금화.

현재 환율로는 어림잡아 2만 마르크에 가까운 돈. 빵을 20개 넘게 살 수 있는 돈이다. 커피 고르는 동안에 커피 가격이 올라버리는 판국이니, 정말 한 번에 빵 20개를 사 버리지 않으면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저, 이렇게 받아도 되는 건가요?”

“이 휘장 값이에요.”

1마르크 금화 열 닢을 준 것으로도 모자라, 또 커다란 종이봉투 한가득 빵을 잔뜩 사서 소녀에게 안겨주기까지 했다.

그랬는데도, 이젠 자신의 소유가 된 독일 수군 함장 휘장을 꺼내서 들여다 볼 용기가 없었다. 웃고는 있었지만.

“한국에서 오신 건가요?”

“에에……. 네.”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유창한 일본어나 북경어를 보여줘야지 하고 그렇게 다짐을 했건만, 초장부터 한국인이냐고, 그것도 유창한 영어로 콕 집어 물어보니 별 도리가 없었다. 아니, 아무래도 거짓말엔 소질이 없다는 쪽이 답 아닐까. 이래선 승진은 포기하고 스물 중반 넘으면 정말 시집이나 가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연애 한 번 못 해본 주제에.

“그렇군요.”

소녀는 빵 한 덩어리를 손에 든 채, 벤치에 앉아 멍하니 광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힘없는 미소’조차 짓지 않고 있었다.

“독일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그건…….”

왜 왔더라.

서기관 박화원의 임무는, 현재로써는 수군 부령 강현과 함께 2월 15일까지 모스크바에 도착하는 것뿐이다.

강현이 들르자고 해서.

“동행이, 잠깐 여기에 볼 일이 있다고 했거든요.”

정답이다.

“한국 사람이요?”

“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애써 웃으면서, 박화원은 빵 한 조각을 떼어 입에 집어넣었다. 점심식사도 제대로 안 한 터라, 희고 부드러운 빵은 기분 좋게 씹혀 넘어갔다. 앞으로도 귀국 할 때까지 고생할 것을 생각하면, 살 찔 것은커녕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께서 기절이나 안 하시면 다행이다. 두 번째 조각도 술술 넘어갔다. 옆에는 우유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무슨 일로 여행 중이신데요?”

밝혀도 괜찮을까.

뮌헨 같은 대도시도 아니고, 이런 소도시에서 굳이 자신에게 해코지하려들 사람은 없을 테다.

“그냥, 어쩌다보니까 세계일주랄까, 그렇게 여행하고 있어요.”

남자랑 단 둘이서.

뭔가 가면 갈수록 설명이 이상하게 배배 꼬이고 있었다.

“귀국할 땐,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 모스크바에 가야 해요. 다음 경로는 아직 모르고요.”

“흐음……. 외교관이신가 봐요?”

“읍?”

다시 정곡을 찔리자, 박화원은 목 뒤의 혈이라도 짚인 듯 빵을 입에 문 채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소녀는 그런 박화원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국인이라, 그렇군요.”

소녀는 팔을 뒤로 쭉 뻗어 벤치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조금 들고 눈을 감았다. 이 추운 겨울의 도떼기시장 한 구석에서 바람을 느낀다든가 하는 낭만을 찾으려는 것은 아닐 테다.

뭔가 물어보고 싶었다.

독일 해군의 휘장을 가진 소녀.

휘장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함장 휘장이니 아버지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휘장을 왜 팔려고 했을까.

한국인.

독일의 적이었던 나라.

강현도 전쟁 내내 독일 배와 싸웠다고 했다.

“응?”

갑자기 광장 한 쪽이 시끄러워졌다.

웬 아가씨들과 소녀들과 아주머니들이 한데 뒤엉켜 뭔가를 두고 옥신각신 하는 모양이었다.

“뭐죠, 저거?”

싸움이라도 일어나는 것일까.

“아아.”

소녀의 목소리는 꽤나 무미건조했다.

아까, 훈장 가게 주인의 한숨과 비슷한 맛이 났다.

“외국인 남자라도 온 모양이네요.”

“네?”

구걸이라도 한다는 것일까. 아니, 구걸하는 걸인이라면 박화원도 여기저기에서 얼마든지 봐 왔지만, 멀쩡해 보이는 아가씨들이 수십 명씩 달려들어 구걸하려 드는 광경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 와중에, 몇몇 아주머니들은 어린 딸의 손을 붙잡은 채 경쟁자(?)들을 완력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나중에는 딸의 손을 붙잡은 아버지들도 보였다.

“저, 저러다가 싸움이라도…….”

“이 동네에선 꽤 익숙한 풍경이에요. 아니, 여기보단 킬이나 빌헬름스하펜 같은 곳에서 더 익숙할까요.”

“네?”

킬(Kiel)이나 빌헬름스하펜(Wihelmshaven)이라면 박화원도 들어서 알고는 있는 도시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다른 유명한 도시도 아닌, 작은 군항도시에 불과한 그 둘일까?

“저건, 그냥 구걸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

외국인 남자. 군인들이 많은 도시.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급히 소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소녀의 표정은 힘없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저도 저 중 한 사람이 되어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좋게 말하자면, ‘영업’인 것이다.

무엇을?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여자가 마지막으로 팔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말도 안 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알고는 있다. 조기졸업 했다고는 하지만, 그냥 4년제 대학도 아닌 국립대학을 장학금 받고 다니면서 놀고먹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젠 자기 자신도 아닌, 자신의 ‘딸’을 어떻게든 팔아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부모의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직 밝아서 그런가요. 꽤 오래 버티네요.”

이젠 별 감흥도 없다는 투였다.

“저 사람, 순진한 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 동네에 자주 들르는 유태인들은 역에 내리자마자 호텔보다 여자부터 고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두 손으로 얼굴 가릴 힘도 없을 지경이었다.

제발, 저 남자(인지 뭔지)가 어떻게든 저 엄청난 ‘판매원’들의 벽을 뚫고, 자기 갈 길 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금화 한 닢이라도 얻으면, 가족 1주일 연명할 돈은 되니까요.”

일부러 대놓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치 지옥의 용암에서 뻗어 나온 것 마냥 허우적대는 남자(인지 뭔지)의 소매가 보였다.

“에에…….”

두 손을 가린 손이 점점 떨어져 내렸다.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소매였다.

전임 무관에게서 얻어 입고 다니는 옷이 하도 후줄근해서 못 봐 주겠다며 자신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사 준 코트 소매였다.

그런 옷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창백한 흰 빛의 피부들 사이에서 저런 구릿빛 피부의 손이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부령님!”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강 부령님!”

다가가려고 했다.

“외국 여자다!”

오른쪽 어딘가에서, 그야말로 ‘굶주린’ 눈빛의 소년들이 떼를 지어 달려드는 광경을 보기 전까지는.

“Ein Dollar! Ein Dollar!”

“Dame, Ich bin ein Dollar, sehr billig!(아가씨, 저 1달러예요, 정말 싼 거예요!)”

“으으, 이건 뭐야!”

벌써 박화원의 주변 절반이 소년들에 의해 ‘점령’되어버렸다. 막무가내로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소년들에 이어 청년들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1789년 파리 거리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자가 남자 귀족에게 몸 판다는 이야기야 들었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몸 팔려고 들 줄이야.

“Nein(싫어)!”

주변이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뚫고 지나가야 했다. 옷을 붙잡은 손을 억지로 후려치면서, 박화원은 엉망진창으로 겹쳐진 소녀-아가씨-아줌마 무더기에 달라붙었다. 그와 함께 소년-청년 무더기들도 달라붙어버렸다. 밖에서 보면 이게 웬 난리인가 싶을 것이다. 순찰 돌던 경찰관 두어 명이 보였지만 잠시 멈춰 서서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더니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할 뿐이었다. 광장의 다른 사람들은 다른 때라면 관심도 안 가질 것을 오늘은 상황이 요상하게 되었으니 재미있어서 구경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 전에 모자가 어디로 갔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옷의 단추 하나가 떨어져나간 것 같았다. 사방에서 풍겨오는 누린내와 화장품 냄새에 숨이 막혀왔다. 내 가슴에 손대는 거 누구야!

“부령님!”

“박 서기!”

간신히 틈을 비집고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세계 어디에 떨궈놔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까무잡잡한 피부의 어린 부령이 보였다. 갑자기 몸이 꽉 옥죄어왔다. 오른쪽 볼이 후끈거렸다.

“정신 바짝 차려요. 밀어버릴 테니까!”

“네, 넷!”

“으아아아아!”

아마도 ‘와르르’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한다.

어느 샌가 자신의 두 발은 바닥에서 멀어져 있었고,

그 발밑의 바닥이 흘러가고 있었으며,

어린 부령은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그 텁텁한 공기가 어느새 탁 트인 맑은 공기로 바뀌어 있었다.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을 두고 빙 둘러선 남녀의 무리들도 눈에 들어왔다. 농기구만 손에 들면 영락없이 마녀사냥 나선 중세 농민들이다. 남자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하나둘 씩 빠져나가는 분위기였지만, 여자들은 눈치를 보면서도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 또 아수라장이 펼쳐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강현의 앞으로 나서서 팔을 벌린다고 벌렸는데, 막상 고개를 돌려서 확인하니 발꿈치는 고작 절반 정도밖에 펴지지 않았다. 거울을 보면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뭘 어쩌려고요?”

“부령님,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번역 좀 해 줘요.”

“뭐라고 할 건데요?”

침을 꼴깍 삼켰다.

벌린 팔의 끝에서 주먹이 말렸다.

“이 사람, 내 남편이에요.”

“어디보자……. Er ist mein Mann 이던가?”

“건드리지 말아요.”

“Berühren sie ihn nicht 정도? 근데 이건 왜요?”

참으로 속 편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박화원의 속은 양주를 댓고리로 부어넣은 듯 했다. 찌르르 하고 울리는 것이 유리라도 깰 기세였다.

“Er ist mein Mann!”

“에?”

광장 전체가 굳어버렸다.

“So, berühren sie ihn nicht!”

“저기, 박 서기?”

뒤에서 강현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죽었다 깨난다 해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여자들은 이제야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흩어졌으면 얼마나 좋아!

“하아…….”

펼쳤던 팔을 간신히 내리면서, 고개도 따라서 내려가고 있었다. 하는 김에 무릎까지 내려가면 좋을 걸.

그리고 호텔에서 깨어나면,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하나도 기억을 못 한다거나.

“일단은, 뭐, 고마워요.”

“네에.”

힐끗 돌아보니, 이 뻔뻔한 수군 무관은 코트를 벗어서 먼지를 털어내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하지만 뭐라고 따질 기운도 없었다. 비틀거리면서 어깨에 기댈 염치가 없었다.

“후아, 저 사람들 대체 뭐래. 멀쩡하게 생겨서 구걸하는 것 같진 않은데.”

이 남자는 차라리 이렇게 멍청한 채인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광장에 모인 소녀들 중 가장 예쁜 아이를 찾으며 고민하는 강현이라니, 상상도 하기 싫은 광경이었다. 본국의 지령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먼저 바르샤바로 가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친 데 없어요?”

“없어요.”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이 나와 버렸다.

“여기엔 왜 나와 있는 거예요? 호텔에서 좀 쉬고 있지.”

“그러는 부령님은요? 말도 없이 어딜 가 있었어요?”

“내야 뭐 찾을 게 있어서 좀 돌아다녔죠. 이거 참…….”

“네?”

가지가지 한다. 그럼 여태까지 자신을 내버려 두고 점심도 내팽개친 채 돌아다니면서 정작 해놓은 일은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방금 전에 자신이 대체 뭘 한 건가, 하고 회의감이 밀려들고 있었다.

“저어…….”

꽤나 쓰라린 듯 입맛을 다시는 강현과 그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박화원 사이로, 빵 봉지를 든 아까 그 소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이렇게 되니 화도 내기 힘들었다.

“누구예요?”

“그게, 그럴 일이 좀 있어요. 어쩌다 보니까…….”

한국말을 아는 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 해도 당사자가 있는 곳에서 자초지종을 자세히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소도 자기 흉보는 소리는 싫어한다고 하지 않던가.

“일행이신가요?”

“네.”

아까, 분명히 ‘세계일주’중이라고 했다.

“외교관?”

“아니, 전 수군 무관이에요. 일단은 사복이지만.”

강현은 배 타던 시절에 칭다오에서 배웠다는 독일어로 소녀에게 대답했다.

그 독일어가 얼마나 엉망인 것일까.

소녀의 표정이 싹 굳어버렸다.

“참,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상대방이 당황해서 굳어있건 말건, 그 엉터리 독일어로 잘도 질문 할 생각을 하는 강현이었다.

“혹시, 이 동네에서 동양인 소학생 여자애 본 적 있어요?”



막시밀리안 리히터(Maximilian Richter)씨는 이 작은 항구도시에서도 꽤 유명한 선장 중 한 사람이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인플레이션의 와중에서 외화를 마음껏 만질 수 있는 원양상선 선장이라면 부유층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이 항구도시에서 부유한 고급선원이 어디 한둘일까.

리히터 선장의 유명세는 그의 특이한 모험담이 한 몫을 했다. 1915년 8월, 연합군의 산동반도 공세로 독일령 칭다오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자신의 배, 4천톤급 화물선 사피어(Sapir)에 독일인 어린이, 부녀자 500명을 태우고 칭다오를 탈출해 중립국 선박들로부터 식량과 석탄을 구입해 보충하며 연합국 해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이곳, 브레머하펜에 닿았다. 그 공로로 그는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야 역시 저울에 매달아 무게만큼 값 쳐주는 고철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아직 어릴 때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때 이 마을 전체가 떠들썩했어요.”

지금까지 내내 어두운 표정만 짓던 소녀가, 아마도 처음으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때, 선장님이 데려온 아기가 하나 있었어요.”

“아기요?”

“네. 동양인 아기요. 바다 한가운데서 궤짝에 담겨있던 걸 선장님이 주웠다던가,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거 말고도 이런 저런 소문이 많이 있긴 한데, 들어보면 바다 끝에 용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수준의 소리죠.”

소문이라고 하면 저기 소학교 교문 앞에서 하릴없이 시계만 쳐다보고 있는 정체불명의 수상한 청년 아저씨만큼 많이 몰고 다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무슨 소문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과 2년을 같이 지냈으면, 지금쯤은 소문에 무관심해지는 게 순리 아닐까.

“어느 어린 한국인 부부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애를 낳았는데, 도저히 키울 길이 없어서 선장님한테 애를 맡겨버렸다거나.”

“네?”

큰 눈이 반으로 줄어들어버렸다.

“한국 해적들이 중국 바닷가 마을을 뒤엎어버리고는 갓난 여자애를 노예로 키우려고 끌고 갔는데, 독일 배가 그걸 공격해서 여자아이를 구출해가지고 여기로 데려온 거라든가.”

반문할 기운도 없었다.

“한국이 독일을 망하게 하려고 저 애한테 주술을 걸어서 배에 집어넣었다는 소문도 있었어요.”

입 벌리기도 귀찮다.

“아, 아마도 선장 부인께서 직접 했다는 말이 있었죠.”

“뭐라고 했는데요?”

왠지 두근거린다.

선장 부인이 한 말이라면, 사람들이 떠드는 말 보다는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일 테다.

“언젠가, 부모가 직접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했다던가요.”

손톱을 깎아놓길 잘 했다.

하기야, 해적 출신이다. 아니, 정확히는 사략선. 아니, 정확한 명칭은 동원유격함과 동원유격전대원이라던가.

그 바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신이 알 도리가 없다. 1915년이라면 저 남자는 15살 어린 나이였다. 안 그래도 질풍노도의 시기, 게다가 미래가 안 보이고 내일이 안개 속에 숨어서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는 해적, 아니 사략선, 아니 동원유격함 생활. 그 와중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 게 뭘까.

정말 먼저 모스크바로 가버릴까. 모스크바가 힘들다면 바르샤바, 바르샤바가 힘들다면 베를린으로라도.

아니, 지금 도망친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얼굴 볼 사람이다.

-데엥! 데엥! 데엥!

“학교 끝났네요.”

학교 종이 울렸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교문을 향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온통 금발, 아니면 갈색 머리의 게르만 아이들뿐이다. 동양인은커녕 머리 검은 아이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늘 내로 찾을 수는 있는 걸까,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강현이 걷기 시작했다.

무작정 걷는 것은 아니었다. 시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디를 향해 걸어야 하는 지는 확실했다. 아이들을 밀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박화원도 일어나서 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뭐라 떠들며 교문을 통과하는 한 여자아이.

누가 봐도 틀림없는 동양인이다. 혼혈도 아니었다. 동양인 중에서도 금방 티가 나는 동남아시아나 남중국 계열도 아니다. 일본인도 아니다. 나하에서 1년만 살다 보면 야먀토인과 류큐인을 구별하는 눈 정도는 생긴다.

한참 떠들던 아이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아저씨’를 보더니, 움찔 놀라며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이는, 본 적이 있을까?

자신과 똑같은 피부를 가진 사람.

시릴 정도로 하얀 피부가 아닌, 따스한 온기가 서린 노르스름한 피부를 가진 사람.

강현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다.

손을 뻗었다. 아이의 손에 닿았다. 붙잡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은 아이의 손이 뒤로 빠졌다. 멈칫하던 강현의 손이 다시 뻗어나갔다. 달래면서, 달래면서, 그 손을 잡았다.


“소야.”


덧글

  • 암호 2009/08/23 17:52 # 답글

    오랜만에 집필이시군요.
  • 천지화랑 2009/08/23 19:11 #

    쩌업
  • sephia 2009/08/24 10:55 # 삭제 답글

    함부르크.... 독일 킬 쪽입니까?
    함부르크도 항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 천지화랑 2009/08/24 15:30 #

    여기에 나오는 '브레머하펜'은 브레멘에서 북쪽으로 가면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도시 규모는 작지만 항구 규모는 독일 1위라고 하는군요. 함부르크항이 운하항인데 비해 브레머하펜항은 연해항입니다.

    빌헬름스하펜은 브레머하펜에서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군항+석유항입니다.
  • 르-미르 2009/08/24 16:36 # 답글

    헛, 소뷔르..가 보였던건 눈의 착각일까요 (..)
  • 천지화랑 2009/08/24 16:41 #

    '소블렘'은 못 보셨습니까?[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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