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류큐의 비극 - 인두세 ♧:1920'S(설정&자료):♣

인두세란 제도는 정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그 역사만큼이나, 또한 엄청난 부작용을 자랑하죠. 경제활동을 하건 안 하건, 무차별적으로 부과되는 그 세금은 지금까지 무수한 서민들을 파탄으로 이끌었고, 그만큼 정권으로써는 폭동을 감수해야만 하는 최후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사키시마에 속한 섬들(이시가키, 미야코, 요나구니, 타라마 등)과 관련해 인터넷을 뒤져보면 꼭 나오는 이야기가 '인두세'입니다. 심지어는 인두세에 대한 전설이 얽힌 장소들(인두세석이나 쿠라마바리 등)은 관광지가 되었을 정도죠.





16세기, 지금의 오키나와현 전역과 아마미제도를 다스리던 류큐왕국은 중계무역으로 번성하던 평온한 나라였습니다. 유사 이래 수백년을 끌어오던 열도 통일전쟁은 끝이 났고, 우치마 카나마루(內間金丸 / 尙員王 / 1469~1477 재위)에서부터 시작된 제2상씨왕통은 류큐왕국 내에서 더 이상 권위의 위협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죠. 비록 16세기 중엽 이후 류큐 중계무역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버리고 직접 해외 통상에 나서면서, 그리고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서양 세력이 동남아시아 무역을 잠식하면서 류큐의 중계무역은 상당부분 타격을 입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직 류큐는 명의 책봉을 받는 독립 조공국으로써 잘 버텨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609년(寧王 21年), 임진왜란의 실패로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사츠마번은 번 내부의 정치적, 경제적 궁핍 해소를 위해 류큐를 전격 침공하게 됩니다. 사실 이 침공은 어느날 갑자기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1592년(寧王 4年)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류큐에 부역(병력 7000인 유지자금 10개월분)을 부과하는 등 16세기 말부터 일본의 권력자들은 인접한 소국인 류큐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했고, 사츠마번이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류큐 정벌을 허가받은 것은 침공 3년 전인 1606년(寧王 18年)이었으니까요.

1570년대 이후 중계무역이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그럭저럭 고대국가 체제를 유지해나가던 류큐는 사츠마의 침공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됩니다. 국왕 쇼네이(尙寧)는 인질로 사츠마에 억류되고, 류큐령이었던 아마미제도의 5개 섬은 이 때 일본령이 됩니다. 1611년(寧王 23年), 네이왕은 간신히 풀려나 귀국하게 되는데, 이 때 사츠마는 네이왕으로 하여금 이른바 '키쇼몬(起請文; 서약문)'을 쓰게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琉球は幕府や島津への義務を怠ったために、薩摩によって征討された。そのため琉球はいったん滅んだが、島津の恩情により、奄美諸島をのぞく沖縄諸島以南を再びあたえられた。この御恩は子々孫々まで忘れず、決して島津氏にそむかない

류큐는 막부와 시마즈(가문)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사츠마에 의해서 정벌되었다. 그 때문에 류큐는 일단 멸망했지만, 시마즈(가문)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아마미 제도를 들여다 보는 오키나와 제도 이남을 다시 (류큐에게)주었다. 이 은혜를 자자손손까지 잊지 않고, 결코 시마즈씨를 거역하지 않는다.」


이어서 '키쇼몬'에는 류큐가 지켜야 할 '규정 15조'가 붙습니다. 그 15조의 내용을 대충 살펴보면, 사은사(국왕 즉위시) 및 경축사(쇼군 즉위시)의 파견, 국왕, 세자 책봉 등의 사츠마 승인, 사츠마의 봉행(감시관)의 상주, 대중국 무역에 대한 사츠마 허가 필수, 중국 무역 물품 일체를 사츠마가 관할, 중국 외 국가에 대한 상선 파견 금지, 사츠마의 조인 없이 상행위 일체 금지, 크리스트교의 금지, 기타 등등.

여기에, 1612년부터 재개된 대명 조공무역은 기존에 2년1공(2年1貢)이던 것이 무려 10년1공(10年1貢)으로 줄어듭니다. 그만큼 교역이 줄어들고 재정 역시 보충되지 않는다는 뜻이죠. 1633년(豊王 13年)이 되면 다시 2년1공으로 회복됩니다만.
1. 파탄난 재정 - 그 해결책

사츠마의 지배 하에서도 쇼쇼켄(尙象賢/朝秀羽地 / 1617~1675)이나 사이온(蔡溫/蔡溫具志頭文若 / 1682~1761) 같은 훌륭한 정치가들이 등장해 류큐 재건에 힘씁니다만, 이미 중계무역은 기반부터 무너지고 명(후에는 청)과 사츠마 양쪽에 조공을 바치는 지경까지 이르자 류큐 왕부의 재정파탄은 18세기에 이르자 더 이상 손을 쓸 도리가 없을 지경에 이릅니다. 기본적으로 섬나라 - 그것도 아주 작은 - 인 류큐는 무역이 아닌 1차산업만으로 지탱하기엔 힘든 입지였으니까요.

무역은 기반부터 무너졌고, 이제 류큐는 재정 파탄의 타개책을 내부에서 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답은 무엇일까요. 결론은 하나, '인두세'였습니다. 네, 바로 근세 류큐사의 비극을 부른 그 장본인이 등장하는 겁니다.


2. 인두세의 시작

1636년, 류큐 왕부는 전국에 걸쳐 호구조사를 시행했고, 그 다음해인 1637년(豊王 17年) 사키시마제도(先島諸島/ 미야코, 야에야마)에 공조(貢租; 조공)를 부과하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인두세는 a. 두당 균등납세 / b. 연령별 차등납세의 두 가지가 있는데, 류큐에서 시행된 인두세는 후자였습니다.

인두세의 기준은 1659년(質王 12年)에 이르러 완성됩니다. 이 때가 되면 사키시마에서는 공조 물품에 상포(上布)가 추가되죠. 그런데 웃기게도 이놈의 인두세는 본토, 우치나(오키나와)에는 적용되지 않고, '지방'인 사키시마 전역과 쿠메지마 일부 지역에 적용됩니다.

마을은 규모에 따라 상촌 / 중촌 / 하촌으로
사람은 상(21세~40세) / 중(40세~45세) / 하(45세~50세) / 하하(15~20세) 로

나뉘었고, 1659년 당시 미야코에 3881여석, 야에야마에 2666여석이 할당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3. 그리고 비극

그런데 문제는 인두세의 직접적인 타겟이 된 사키시마의 두 지역(미야코, 야에야마)입니다. 이 중에서 미야코는 그야말로 '물'에 목숨을 거는 곳이죠. 지대가 낮은 탓인지 건조하거든요. 미야코의 서사시들 중에는 '물'을 찾는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옵니다.

워낙 인두세가 가혹하다보니 갓난아기를 압살(壓殺)하거나 낙태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나고(名子)로 불리는 농노가 생겨납니다. 일설에는 근세 류큐에 3천 명의 농노가 있었다는데, 1749년 류큐 인구가 2만명에 불과했으니 어마어마한 수치죠. 전 인구의 1/7이 졸지에 농노로 전락한 겁니다.

미야코지마에 있는 인두세석(人頭稅石)


게다가 인두세는 미납(米納)을 기본으로 하고, 여기에 상포대납(上布代納)을 추가합니다.. 이것은 그저 농업생산량만 늘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여성들이 쉴 틈도 없이 베틀 앞에서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미야코의 상포는 품질이 좋아 상포대납이 거의 강제화 되었는데, 인두세로 바쳐진 상포의 2/3가 사츠마에 진상되고, 이 상포는 다시 일본열도 전역에서 '명품'으로 각광받게 되죠. -_-;;


작은 섬들로 구성된 류큐에서, 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계속됩니다. 획기적인 품종개량이나 비료제조공법이 없는 상황에서 쌀 생산량을 늘리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경작지를 늘리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농민들이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 이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키시마제도가 위치한 곳이 북위 24~25도의 아열대 지방이라는 겁니다. 미개척지에는 모기가 들끓고 이런 곳에서는 반드시 말라리아가 창궐합니다. 왕부는 수많은 농민들을 강제로 큰 섬의 미개척지로, 혹은 미개척 섬으로 이주시키지만,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마을들은 얼마가지않아 말라리아로 폐촌이 되고 맙니다. 이런 '섬 분리'를 '스마바키'라 부르는데, 이로 인해 생이별을 하게 된 사람들의 노래는 여러가지로 남아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두세에 얽힌 여러가지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예를 들면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에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이야기가 내려오지요. 하나는 '쿠부라바리 전설'로, 요나구니지마의 인구 조절을 위해 섬 안의 임산부들을 모아 쿠부라무라(久部良村)의 들에 있는 바위의 갈라진 틈으로 뛰어내리게 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토운구다(人桀田) 전설'로, 15~50세의 남자를 비상소집해 늦게 온 자는 바로 참살했다고 합니다.

문제의 쿠부라바리(久部良ベリ). 인구 조절을 위해 임산부들을 이곳에 밀어넣었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771년(穆王 20年)에는 야에야마에 엄청난 쓰나미가 닥칩니다. 이 쓰나미로 기록에만 9,313명이 조난을 당하는데, 무려 류큐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였죠. 왕부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재해지역에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야에야마는 계속되는 인구 감소로 제도 전역이 황폐화된 가운데 어떤 준비도 없이 근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4. 인두세에 대한 반발, 그리고 폐지

야에야마는 쓰나미가 겹쳐 전 지역이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아직 기력이 남아있던 미야코에서는 대대적인 반 인두세 항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1678년(貞王 10年)에 타라마지마(多良間島)에서 일어난 반인두세 폭동(타라마 사건)입니다. 이후에도 이른바 '수확 사건'(割重穀사건/1848년 / 인두세 부정수수로 일어난 폭동)이나 아코메 사건(1855년 / 타마라 주민 5명이 수도에 올라와 공무원들의 횡포를 호소한 사건), '참서 사건'(1860년 / 인두세에 대한 탄원서 사건) 등등, 근대로 오면 올수록 인두세에 대한 저항은 격렬해지죠.

이른바 '류큐처분'이라 불리는 류큐 병탄 당시 일본측에서 작성한 류큐인 동향 자료에 보면, 류큐의 대부분 농민들은 가혹한 인두세가 폐지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일본의 지배를 반긴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실 웃기는 일이죠. 그 인두세를 불러온 장본인이 누군데요. -_-;;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인두세는 폐지될줄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1872년에 류큐왕국이 멸망하고 류큐국주 쇼타이(尙泰)가 류큐번주로 격하되어도, 1879년 류큐번이 폐지되고 카고시마현에 편입된 후에도 인두세는 폐지되지 않죠. 류큐처분 당시 일본의 류큐에 대한 인식이란 것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분할도 가능한 '도마뱀 꼬리'같은 존재였습니다. 심지어는 사키시마를 청국에 분할하려 하거나(1879년), 1945년 패망 당시에는 순순히 미국측에 류큐를 내어주거나....

사실 엄연히 '다른 나라'였던 류큐였으니, 아무리 형식상 '내지'로써 '폐번치현'을 했다 해도 그 지배정책은 결국 식민지나 다를 바 없게 되고 맙니다. 일종의 '현상유지'와 그로 인한 반발 무마에 급급해지는 것이죠. 사실 류큐처분 이후에도 몇 년간, 일본 정부는 류큐 사족들의 반발 - 의외로 끈질겼습니다 - 을 무마하는데 상당한 정력을 소비해야 했거든요. 그렇게 세월아네월아 시일을 질질 끌던 오키나와현의 양전사업은 1903년에야 끝이 나고, 류큐사의 비극으로 남아버린 인두세 역시 이 때 가서야 폐지됩니다.




자료 출처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 - 호카마 슈젠(外間守善) 저 /  심우성 옮김 / 동문선 현대신서 / 1986년
http://www.tabiken.com/history/doc/J/J226R200.HTM
http://www.vill.tarama.okinawa.jp/tarama/history-table.htm
http://www.ocvb.or.jp/card/ja/0030000068.html
기타 생각 안나는 각종 잡다한 사이트들

덧글

  • 들꽃향기 2009/02/02 00:36 # 삭제 답글

    그러고보니 20세기에 대처정부도 인두세(Poll Tax)의 도입을 시도했다가 정권이 아작다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간 인두세는 20세기에도 매력적이었던듯? ㄷㄷ
  • 천지화랑 2009/02/02 00:38 #

    뭐 태그에도 써놨지만 남야그가 아니죠 -ㅁ-;;
  • ghistory 2009/02/02 01:02 # 답글

    우치마 카나마루: 이 시기에도 일본식 인명을 썼을 리가?
  • 천지화랑 2009/02/02 01:16 #

    그래서 좀 혼란스럽더군요. 쇼쇼켄만 해도 쇼쇼켄이라는 중국식 이름과 하네지 죠슈라는 일본식 이름이 둘 다 존재하니까요. -_-;; 저자는 우치마 카나마루를 일본계가 아닐까 하고 추정하더군요. 사실 우치마 카나마루도 어디선 카나마루 우치마, 어디선 우치마 카나마루, 복잡합니다. ㅠ.ㅠ
  • ghistory 2009/02/02 01:07 # 답글

    역사비평사에서 나왔다 절판한 오키나와 관련 서적이나 논형에서 나온 오키나와 근현대사 관련 서적들 3권이나 혜안에서 나온 공동저서에 양수지교수가 쓴 논문도 보셨나요?
  • 천지화랑 2009/02/02 01:19 #

    당연히.... 봤을 리가 없지요. ㅠ.ㅠ

    언제 날 잡아서 국회도서관 침공하려 합니다. 말씀해주신 책들 죄다 찾아봐야겠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ghistory 2009/02/02 01:20 # 답글

    제안드릴 게 2가지 있습니다.

    1. 제가 저 도서목록들을 정리해서 보내드리려 합니다.

    2.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인류학과에서 오키나와 연구에 주력하는데, 한 학술행사 자료집들을 여러 부 지니고 있어서 드릴까 합니다.

    다만 이 제안들을 수락하신다면 시간이 좀 걸리고 직접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답변 바랍니다.
  • 천지화랑 2009/02/02 01:36 #

    그래주신다면 저로써는 더할 나위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감히 부탁드리겠습니다.
  • ghistory 2009/02/02 01:45 #

    문제는 이제 접선할 방도를 궁리하는 것입니다. 답신을.
  • 천지화랑 2009/02/02 01:57 #

    지금 광명에 살고 있으니 서울 웬만한 곳은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습니다.
  • ghistory 2009/02/02 02:24 #

    자료 정리 끝나는 대로(지금 책 수천권 풀고 있음) 재연락하지요.
  • 천지화랑 2009/02/02 02:37 #

    네, 기대하겠습니다. ^^
  • ghistory 2009/02/02 01:20 # 답글

    저 동문선 책은 2000년대에 재출간했던 것 같습니다.
  • 천지화랑 2009/02/02 01:37 #

    네. 1986년이라는 건 원저의 출간년도입니다. ^^
  • ghistory 2009/02/02 01:27 # 답글

    蔡溫具志頭文若: 역시 일본식 이름인가요?

    왜 일부 지역들에만 인두세를 부과했는지 궁금합니다.

    오키나와에서의 경험이 조선에서의 토지조사사업의 선례로서 작용했음이 잘 드러나는군요.
  • 천지화랑 2009/02/02 01:52 #

    특히 사이온은 분명 구메모토에서 살았던 중국계 인물인데도 일본식 이름이 추가로 붙는군요. 저 역시 이유가 뭔지 궁금합니다. 쇼쇼켄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그 아버지 이름이 '하네지 우둔'이라고 나옵니다. 어쩌면 '쇼쇼켄'이란 이름은 왕부에서 하사한 중국식 이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아무래도 류큐국 정사인 중산세감이나 중산세보 등이 모두 사츠마 지배 하에서 일류동조론을 바탕에 두고 서술되었으니 그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렇게 치자면 또 오야케 아카하지나 나카소네 도우이미야같은 이야기속의 영웅들 이름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크아아악!]

    지금 그냥 해 보는 생각은, 당시 슈리의 왕부 역시 사키시마 일대를 일종의 식민지쯤으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합니다. 아무래도 1500년대 초반까지도 말 안 듣고 말썽 부리던 동네였던 데다가, 이 지역에 대한 통치기구 정비도 사츠마 침공 이후인 1600년대에야 완성되니....(어디까지나 그냥 혼자 상상할 뿐입니다. -_-;;)


    그나저나 이런 난리통 속에서 아사도야 윤타 같은 로맨스적인 민요가 나왔으니 이것도 참 신기하군요.
  • ghistory 2009/02/02 02:23 #

    류쿠왕국의 공간적 지배도 균일하지 않았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천지화랑 2009/02/02 02:36 #

    저야말로 ghistory님 덕분에 여러모로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
  • 시엔 2009/02/02 02:13 # 답글

    류큐사를 보면 재밌죠. 그런데 류큐의 요미가나가 어떻게 되는지는 참 의문입니다(...). 지난번에도 봤지만 확실히 표준 일본어와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쩝. 그나저나 역시 중국과 유럽을 제외한 곳의 역사는 샤대 아니면 닥버군요. 왠지 씁쓸(...).
  • 천지화랑 2009/02/02 02:15 #

    그래서 하도 포스팅이 없으니 내가 포스팅을 다 하잖냐 -_-;;
  • 耿君 2009/02/02 04:26 # 답글

    잘 읽었습니다~~
  • 천지화랑 2009/02/02 08:05 #

    감사합니다. ^^
  • 행인1 2009/02/02 10:01 # 답글

    그야말로 세금내다가 죽어나가는 삶이었군요. 저게 1903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니 그거 더 깹니다.
  • 천지화랑 2009/02/02 16:15 #

    솔직히 정리하면서도 ㅎㄷㄷ하더군요. -_-;;
  • MadEye 2009/02/02 11:03 # 답글

    일본사를 워낙 모르다보니 좀 어려운 부분도 있었는데, 저 정도로 인두세가 재앙적인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글 잘 보고 갑니다.
  • 천지화랑 2009/02/02 16:16 #

    일본사가 아니다. 류큐사지.
  • StarSeeker 2009/02/02 11:19 # 답글

    류큐인들이 왜 본토인을 미워하는지 알것 같습니다. (물론, 2차대전도 있지만...-_-;)
  • 천지화랑 2009/02/02 16:17 #

    저기에 일본령 시절엔 소철지옥이라고 또 유명한 기근이 하나 있습니다. 어휴.
  • 파랑나리 2012/11/13 04:50 # 답글

    저러는데도 류큐사람이 류큐가 일본땅으로 남기를 바라지 않겠죠?
  • 천지화랑 2012/11/13 10:21 #

    한국엔 친일 종북 없나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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