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10일
휴가 나와서 끄적거리는 마적물 쪼가리
이 소설은
순전히 놈놈놈 때문에 쓰기 시작했다고 말 할수는 없을지도 모를까나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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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마을.
수도 신경에서 동남쪽으로 167km, 가장 가까운 도시인 영길에서도 남서쪽으로 18km나 떨어진 작은 탄광마을, 이정보(二町堡).
대전쟁 이후로 연료 소비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동아시아, 아니 전 세계적으로 석탄 소비량은 무시할 수 없었다. 청국 내 전기 생산에서 석탄이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달했고, 가까운 동러시아에서도 임시수도 블라디보스토크의 전기는 멀고 먼 브랴트의 탄전지대 대신 한국과 청에서 채굴한 석탄을 수입해 만들고 있는 판이었다. 때문에 청국에서 탄광촌이라고 하면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웬만한 향 소재지에 버금가는 번화한 모습을 보여주게 마련이었지만, 아쉽게도 이 마을은 대청의 5대 복선철도 중 하나인 봉천~영길간 간선 철도에서도, 도시에서도 멀리 떨어진 탓에 탄광촌 특유의 번잡함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산 중턱에 핀 버섯송이 같은, 253채의 오두막에 1034명의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연간 2만 톤의 석탄을 캐내어 말이 이끄는 화차에 싣고 영길로 나가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마을. 하루 종일 탄광에서의 고된 노동과 산에서의 각종 채취 활동으로 고단한 몸을 뜨뜻한 아랫목 바닥에 지지며 하루의 피로를 풀어내고 ‘있었을’ 시간의 마을.
온돌을 데우는 불로, 온 마을은 1월의 추위를 녹여내는 훈훈한 온기에 휩싸여 있었어야 했다.
그래야 하겠지만,
지금 이 마을은,
뜨거웠다.
불길이 타올랐다.
아궁이가 아닌 집 전체에서.
그리고 그 불길은 옮겨 붙고 타올라,
바닥에 흩뿌려져 있던 검붉은 피를 바싹바싹 말려가고 있었다.
“이, 이놈들아아아!”
-타앙!
수염이 텁수룩한, 누가 봐도 갱도에서 십수년을 살았을 것이라고 밖엔 생각하기 힘들 법한 사내가 길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전장식 윈체스터 라이플을 겨누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곧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자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지만, 비명은 그의 앞이 아닌 뒤에서 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사내의 상의는 흠뻑 젖어있었다. 바로 옆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으니 땀을 흘려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길 때문에 옷이 검붉게 물들 리는 없었다. 그의 주변에는 점점이 흩어진 쌀알과 각종 곡식들, 그리고 머리나 몸통에 구멍이 뚫린 채 피를 쏟으며 쓰러진 젊은 여인과 노인, 아이들의 시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여인은 아이의 위에, 남자는 여인의 위에 겹쳐진 채 뒤엉킨 시체도 여럿 보였다.
-타앗! 끼야하아!
-꺄악!
또 어디선가 광기에 찬 환호성과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렸다. 마을 어디선가 두 발의 총성이 연이어 들렸다. 어느 것이 누구의 총일까.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별 의미는 없는 고민이었다. 지금은 이 시대에 뒤떨어진 전장식 소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제 꼬질대로 총열을 쑤시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꼬질대가 없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리 사방을 살펴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방금 전까진 꼬질대를 들고 탄환을 장전했단 말이다!
-저기 한 놈!
“제길!”
-쿵!
꼬질대보다도 말 탄 도적놈이 먼저 눈앞에 나타나자, 당황한 남자는 결국 개머리판을 바닥에 내려찍는 편법으로 탄환을 다졌다. 상대편에서도 당황한 듯 급히 소총을 손에 들었지만, 이쪽이 아무래도 좀 더 빨랐다.
-타앙!
-억!
후장식 소총의 명중률이 좋다지만, 험한 산지에서 호랑이와 마적들을 상대하며 사격실력을 키운 광부를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긴 것은 아니었다. 사내의 표적이 된 녀석이 힘없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바닥을 굴러 떨어지는 사이, 뒤에서 나타난 두 명의 마적들이 기병총을 들고 사내를 향해 돌진했다. 이제 재장전은 꿈도 꿀 수 없게 된 사내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총에 대검을 꽂고 창처럼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휘익! 푸슉!
총을 창처럼 쓰는 것은 사내만이 아니었다. 왼쪽 말을 타고 있던 도적이 던진 대검 달린 K-98 기병총은 엄청난 에너지로 사내의 왼쪽 가슴팍을 파고들어 단숨에 심장을 터뜨렸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몸뚱아리가 쓰러지기도 전에 총의 주인은 거친 손길로 개머리판을 잡아 자신의 총을 되찾았다.
이제 모든 것은 끝이 나고 있었다.
비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총성소리,
그리고 고함소리.
침입자들의 ‘소리’만이 마을을 지배하고 있었다.
-거치적거리는 건 죄다 태워버려. 가볍고 쓸모 있는 것만 골라! 야, 너 이 새끼 뭐 해!
-탕!
영길 일대에서 사량파라고 하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무려 200명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와 총원이 독일제 K-98 기병총으로 무장한 막강한 전투력, 그리고 32년에 이르는 유구한(?) 역사까지 더해져, 치안 상태가 영 좋지 않은 영길성 북부지역에서는 경찰보다 사량파가 오히려 주민들의 신뢰를 얻고 있는 판이었다.
마적에 賊이라는 단어가 붙어있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을 비롯한 이웃 국가에서는 청국 내의 마적들을 산적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애초에 마적이란 집단은 19세기 말에 중앙의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동북 관외지방에서 생겨난 민간 자위조직이 그 시초였다. 이들은 치안을 유지하고 부패한 지방 행정조직에 맞서 싸웠으며 심지어는 군벌과의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서, 1200명의 병력 지휘도 제대로 못 했던 엽지초 따위가 사령관 노릇 하던 청 정부군보다야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던 마적 두목들의 지휘능력이 월등한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의 마적들은 때때로 만주를 둘러싼 국제적인 분쟁에도 참가했다. 실제로 1894년의 청일전쟁과 1898년의 청한전쟁 모두, 한국군과 일본군을 괴롭힌 것은 청 정부군이 아니라 마적들이었다. 6개 여단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던 한국군은 이를 쉽게 토벌할 수 있었지만, 기병이 거의 전무했던 일본은 결국 역으로 청의 마적들을 고용해 이 사태를 해결했으며 이어진 러시아와의 전쟁 역시 동맹이었던 한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적을 고용해 러시아군의 배후를 교란하며 전쟁을 치러야 했다.
사량파도 그런 만주 마적의 일파였다. 창설된 지 8년밖에 안 되었던 1898년의 청한전쟁기에 목단강 지역에서 한국군과의 전투로 거의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긴 했지만, 1904년 만주전쟁기에 일본군이 8만원, 1915년 대전쟁기에 일본군이 거금 17만원을 주고 이들을 고용하면서 사량파는 무섭게 성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오늘날 만주의 수많은 마적들이 거의 비적화 되었다 해도 사량파는 전통 있는 마적단으로써 나름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마을에 대한 노략질은 최대한 자제했다. 가끔 중요한 의뢰를 받거나 목표가 생긴다면 영역 내의 마을일지라도 습격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필요 이상의 살상이나, 특히 방화, 약탈, 강간 등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혹 어느 젊은 소부대의 두령이 젊은 치기에 함부로 그런 짓을 벌인다면, 해당 두령은 오른팔을 자른 채 말에 꽁꽁 묶어 황야에 내던지는 것이 사량파의 규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그 사량파가 이정보촌, 별로 중요할 것도 없는 작은 탄광마을을 습격해, 그것도 아예 마을 전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린 것이었다. 동원된 인원은 총원의 절반 정도인 100명가량. 지휘는 좌부수령으로 알려진 보르지기드 무르였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일까. 단순히 치기어린 불장난으로 보기엔 그 규모가 심각했다. 그렇다고 사량파 내부에 권력투쟁이 발생했다는 정보도 들은 바 없었다. 바로 어제만 해도 영길시내의 술집 ‘지화’에는 수령 자와와 우부수령 장신, 그리고 지금 눈 앞에 있는 무르가 함께 나타나 권커니 잣커니 하며 떠들썩하게 놀다 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남는 답은 단 한 가지다. 저들이 이정보촌을 공격해야 하는, 그것도 완전히 지도에서 없애버려야만 하는 의뢰, 혹은 목적이 생긴 것이다. 물론 만주에서 이런 짓을 시킬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최근 들어 영길광업을 인수하려 한다는 소문이 드는 청국 재계 서열 5위, 광업계 서열 2위의 북청광업일 수도 있고, 이 마을로 숨어든 한인(漢人) 불순분자를 청국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속 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관동청, 혹은 주청 일본대사관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골 때리게도, 신경 천도(말이야 좋지만 다들 관내 상실이란 말을 썼다) 이후 어떻게든 재원 확보에 목을 매고 있는 청국 정부일 수도 있었다. 혹시 아는가, 마을 어디에 2억 달러가 입금된 스위스은행 통장이 감춰져 있는 것을 신경의 안경잡이 황제폐하께서 천리안에 관심법까지 써서 찾아내셨을지.
아무렴 어때,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쨌거나 아무 힘도 없는 마을 하나를, 그 누구에게도 도움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약한 사람들을, 그 비명을 즐기며 제멋대로 유린한 마적.
그 한 가지만으로도 자신이 이제부터 시작할 모든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응.”
그 결론에 대해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등에 멘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의 묵직함을 온 몸으로 감내하며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1034명의 복수를 준비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기분이 좋질 않았다.
물론 명령, 그리고 의뢰였으니, ‘내려오는 명령 거역 안 하고, 주는 의뢰 거절 안 한다.’라는, 사량파의 신조를 철저히 받들어 실행에 옮기긴 했다. 하지만 스스로가 마적단 부두목이면서도, 이번 마을 ‘소탕’은 왠지 해선 안 될 짓을, 예를 들어 소학생 시절에 도둑질을 하는 것과 같은 ‘몹쓸 짓’을 한 것 같다는 불안감으로 그를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두목,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계시우? 간만에 화끈하게 한 건 했는데.”
흔들리는 말 위에서 불알이 아파오는 것을 참으며 잠시 입술을 찡그리던 제1기장 시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몰아 무르의 옆으로 다가오며 실실 쪼개댔다. 녀석의 헤퍼 보이는, 그리고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웃음에 미간에 주름을 한 번 잡아준 무르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 상대였지만, 마음 심란할 땐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최고였다.
“아무래도, 형님께서 이번에 왜 이런 일을 내게 맡기셨는지 통 이해가 되질 않아. 마을 소탕이라니.”
“그야 뭐……. 솔직히, 힘 있는 양반들이 이거 해라 하면, 이쪽에서 별 수 있수? 화 안 당하고 살려면 마을이든 도시든 되는 대로 조지는 수밖에.”
“그래도, 아예 마을 하나를 통째로 지도에서 지우는 일은 여태까지 없지 않았느냐. 게다가 겁탈까지 용인하고. 그렇다고 이유를 알려주시는 것도 아니고.”
“크흠, 험!”
‘겁탈’이란 말이 나온 순간, 시보는 눈에 띄도록 큰 헛기침을 내뱉어댔다. 워낙 계집을 밝혀 영길시내 홍등가에서 얼굴이 팔릴대로 팔린 이 녀석은 아마 오늘 마을 ‘소탕’에 나서면서 간만에 젊은 처녀들을 실컷 데리고 논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당장 타고 있는 말을 도리깨로 내리쳐 낙마를 시켜버릴 일이었지만, 이미 수령 자와에게서 직접 허락을 받은 일이었으니 부수령에 불과한 무르가 뭐라 할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다른 부하들 역시, 오랜만에 억눌린 욕정을 마음껏 분출시킨 일을 두고 저마다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무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이건 늑대라도 나타날 분위기입니다.”
“음, 잘 하면 호랑이가 나올지도 모르겠군. 대정들에게, 언제라도 전투준비를 갖출 수 있도록 지시하거라.”
“예, 두목!”
좌부수령의 명령을 받은 시보는 나무로 된 호각을 길게 한 번, 짧게 한 번 불어 예하 대정들을 소집했다. 사량파 전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제1기 예하의 대정 5명이 말을 몰아서 앞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무르는 그 역시 독일제 마우저 M-1896 권총에 탄환을 잰 후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면서 좁은 산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오른쪽은 낭떠러지, 왼쪽은 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진 산비탈이다. 게다가 오늘은 구름이 많이 낀 탓에 달빛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길에서 맞서 싸워야 할 존재라면 차라리 호랑이가 나오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호랑이야 큼직한 거 하나만 노리고 여럿이 동시에 총을 쏘면 속절없이 죽지만, 늑대는 말보다도 작은 것이 수십 마리씩 떼를 지어 달려드니까.
‘늑대라…….’
과거에 비하면, 그러니까 청국이 관내를 상실하고 관외로 철수하기 전에 비하면 늑대에게 습격을 당해 떼죽음을 당할 일은 사실 많이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무기는 갈수록 발전하고 관내에 비해 부실하던 통치기구도 나름대로 정비되어 가는데 비해, 곳곳에 사람 사는 마을이 들어서면서 늑대가 살아갈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려 1920년대에 들어서도 늑대에게 마적 수십 명이 떼로 시체가 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바로 올해, 선통 14년(서기 1922년)에도 한 번 일어난 적이 있었다.
울음소리 따위는 전혀 없다.
그리고, 마적으로써 그 모습을 보게 된 자는 죽는다. 반드시.
민간인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마을을 습격하고 민간인들을 도살한 후 의기양양하게 귀환하던 마적은 얼마든지 그 표적이 될 수 있다. 청 육군이나 경찰이 표적이 된 경우도 있긴 했지만, 마적에 비하면 그야말로 어린애 박치기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알고 보면 마적 소탕 따위를 핑계로 각종 만행을 저지르던 부대들이었다.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늑대에게 당한 시체들에게서, 손톱, 혹은 이빨자국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간혹 칼이나 도끼에 베이고 찔리고 찍힌 상처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총상’이라고밖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1920년, 선통 12년에 봉천 인근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이 늑대는 작년 1921년이 되면서 봉천 일대의 마적 186명과 육군 8명, 경찰 11명을 죽이면서 마적계에서 현상금 3500원을 걸고 추적에 목을 매고 있었다. 문제는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남만주 주요 도시의 술집에서 마적들의 눈에 띄어 술 마시다 말고 비명횡사한 떠돌이 총잡이만 해도 지난 한 해 동안 열 명이 넘었다.
“설마…….”
오늘, 조직 역사에 전례가 없었던 이 일이, 혹시 그 ‘늑대’를 불러내어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100명이 넘는 1개 기 전력이라면, 보통 많아봐야 20명 정도를 사살하는 것이 고작인 ‘늑대’를 잡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늑대’가 어린 여자아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수령 자와가 ‘늑대’에 대해 은근히 관심을 보이고 있기도 했다. 어쩌면 호색한으로 소문난 신경의 황제가 군을 동원하기엔 속 보이는 ‘소녀 늑대 생포’에 마적을 동원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타앙!
-악!
이것저것을 종합하여 현 상황을 정리해보려 하던 무르의 시도는 여기에서 끝이 났다. 그의 대뇌가 단 한 발의 총성을 인식하면서, 그리고 한 명의 부하가 말에서 굴러떨어지면서.
-탕! 탕!
-억! 크억!
“뭐, 뭐냐!”
“늑대다! 봉천의 늑대다!”
“느, 늑대!”
늑대.
그 한 마디가 기폭제가 되었다.
설령 수도 신경 인근의, 조직원 500명을 거느린 구룡파가 쳐들어온다 해도 기죽지 않을 부하들이, ‘늑대’라는 단 한 마디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는 것이다. 좁은 길 위에서 수십 마리의 말이 뒤엉켜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 와중에 몇몇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가파른 낭떠러지 밑으로 말과 함께 떨어져 내리기도 했다.
“당황하지 마라. 치!”
“시보!”
눈 깜짝할 새에 일이 벌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넉살 좋게 말을 걸던 시보 녀석이, 지금은 말발굽에, 그것도 그가 애지중지 기르던 조선말에게 짓밟힌 다진 고깃덩어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 죽는 광경이야 대전쟁 이래 지겹게 봐 온 무르였지만, 아끼던 부하가 급작스럽게 죽는 모습은, 그것도 ‘죽어가는’ 모습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다. 수십 개의 말발굽에 밟히고 치여 비명소리와 뼈 박살나는 소리를 내며 죽어가는 시보를 보면서 무르는 그저 멍하니 말고삐를 잡고 있을 뿐이었다.
“두목, 위험합니다. 피학!”
“유, 율포란! 제길, 모두들 이 곳을 벗어나라, 어서!”
“빌어먹을. 대체 저 놈의 총은 탄환이 떨어지지도 않나!”
누군가가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한 사발 가득 푸념을 늘어놓았다. 맞는 말이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5발 넘게 장탄이 가능한 소총은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15발들이 탄창을 사용하는 반자동 소총을 개발하긴 했지만, 유일한 고객이었던 한국군이 1898년 청한전쟁 당시 이 소총을 썼다가 탄환 소모량이 엄청난 것을 보고 창고에 쌓아둔 것을 이제 와서 다시 꺼내 복사하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지금 적이 발사한 탄환 수는 대략 10발에 달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과 말의 시체만 다섯 구가 넘었다.
“두목, 기장도 잃었는데 그냥 갈 수는 없습니다. 저 놈인지 년인지, 내 부하들 모조리 끌고 가서 도륙을 내겠습니다!”
“어디에 있는 줄을 알고 간단 말인가!”
-탕!
잡스런 논의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또 한 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이번에는 좌대정 이경춘이 배를 움켜쥐며 왼쪽 어깨부터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달빛도 비치지 않는 이 어두운 밤에, 적은 놀라울 정도로 고급 목표물만 골라 조준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총알 날아오는 방향을 가늠할 섬광이 통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쓰러진 곳은 최선두부터 중앙까지,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히힝! 히히히힝!
“워, 워! 우선 신속히 이곳을 빠져 나간다. 섣불리 맞서려다간 우리만 불리해져!”
주요 지휘관들이 하나둘 씩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무르가 K-98 소총을 치켜들며 외쳤다. 동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고 두목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본 다른 두령들도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하지 않은 채 무르의 뒤를 따라 부하들을 이끌었다. 다행히 총성은 곧 멎었다. ‘봉천의 늑대’는, 설마하니 말 타고 달리는 마적을 쫓아올 능력은 없다는 것인가? 어찌되었건 간에 이 틈을 놓칠 수는 없었다.
“부방.”
“예, 두목.”
전대정인 부방이 무르의 부름에 대답했다. 이미 모든 대정들은 전사했고, 지금 남아있는 대정이라고는 부방이 유일했다. 심지어 기장마저 죽어버린 상황이었다.
“인보진에 도착하는 대로, 남은 인원을 재정비한다.”
“예!”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달리며 얼굴 피부로 느끼는 바람은 시원하고 상쾌해서 흐르던 땀을 흔적도 없이 증발시켜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르는 지금, 그런 상쾌함 따위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불어 닥치는 겨울 산바람은 하필 등 뒤에서 찝찔한 피 냄새를 한가득 몰고 왔고, 그 바람에 무르는 공기가 아닌 걸쭉한 논두렁물 속을 말 타고 달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한겨울의 만주에서 웬 당치도 않은 땀이 비 맞은 것 마냥 그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무르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산길을 가로막고 선, 마치 처녀귀신 같은 한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
“워, 워워워워~!”
-타앙!
“커억!”
-히히히히히힝~!
-쿵! 철퍼덕!
-히이히히히히힝!
“으, 으아아아악!”
“아아악!”
“내, 내 다리!”
“끄아아악!”
단 한 발의 총성.
그것이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이유 없이 엄습해오는 공포감을 떨쳐내기 위해 무작정 앞으로 달려 나가던 무르는 길 한가운데에서 두꺼운 사냥옷을 입고 모신나강 소총을 겨눈 한 소녀를 보자마자 급히 말을 멈춰 세우려 했지만, 급작스러운 정지 명령에 당황한 말은 총성에 놀라 앞발을 풀쩍 들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모로 쓰러졌다. 내동댕이쳐진 무르가 정신을 수습할 새도 없이, 바로 뒤에서 두목의 말을 따라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또 다른 말이 속도를 줄일 새도 없이 수백kg에 이르는 운동에너지로 무르와 그 말을 강타했고, 그 이후로 수십 마리의 말이 뒤엉켜 쓰러지고 굴렀다. 더러는 땅에 부딪치고 말에 깔린 부위의 뼈가 산산조각이 났고, 더러는 여기에 또 다른 말의 발굽에 ‘다져졌으며’, 더러는 말 위에서 내동댕이쳐져 낭떠러지에 가까운 산비탈을 데굴데굴 굴러 거대한 화강암 바위 위에 널찍한 핏자국을 남기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사, 살려……. 사으으……. 어으으윽…….”
“나, 나 좀 꺼내줘! 누구 아무나아아악! 아아악!”
“……. 세상에…….”
한 명의 소녀가 쏜 한 발의 총알에서 시작된 사망 87명, 부상 14명의 대참사를 피한 것은, 맨 뒤에서 비루먹은 말을 이끌고 힘겹게 따라오던 신참 5명과, 그들과 보조를 맞추며 부르튼 입으로 한참 투덜거리던 가장 끗발 없는 오장 한 명이 전부였다.
아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현장에는 그 어떤 이방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어떤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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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사실은 [무관부] 의 외전으로 들어갈 예정으로 구상중인
미소녀 마적물.[먼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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