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덤으로 교양따윈 캐리어 바퀴에 잘근잘근 밟아뭉개버린 용돌이 천지화랑입니다.
7. 이 블로그는 우이님의 '신혼집' 블로그입니다.

PS: 가끔 주인장이 스팸댓글 지우려다가 엉뚱한 댓글을 날려먹는 경우가 있습니다.
방문객 여러분들의 넓은 아량을 바랄 뿐입니다.




학교가 일찍 끝나니까, 동아리방에 모여서 전골을 끓여먹고, 보드게임을 하다가, 노래방 요금이 오르는 오후 5시가 되기 전에 평서대 앞으로 이동해서 단 돈 5,000원에 무려 3시간 내내 노래를 불렀다.
평서대에 다니는 지아의 언니와 그 남자친구의 안내로 캠퍼스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남자친구가 직접 경영한다는 평서대 후문, 압록강 가까운 곳에 있는 경치 좋은 카페에서 밥을 먹고 후식으로 커다란 파르페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나니 벌써 저녁 9시 30분이었다.
“으아아, 피곤해 죽겠다. 벌써 10시 다 되어가네.”
“집에 가서 씻으면 11시 다 되겠는데. 으아, 우리 오늘 뭐 한거냐.”
무호와 상민이 녀석들은 누구보다도 신나게 논 주제에 누구보다도 푸짐한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도 그 후회 가득한 푸념에서 스스로가 고등학생이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니 기특하게 여겨야 할까. 중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내온 이 친구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혼란을 느껴온 지 오래지만, 그 혼란이 어쩌면 대학교 들어갈 때까지 앞으로도 2년은 유지될 거라 생각하니 공기 탁한 노래방에서 느꼈던 두통이 다시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나저나, 잉잉 이 인간은 동생만 놔두고 어딜 간 거야?”
고등학생 치고는 상당히 사치스러웠던 오늘을 만들어 준 일등공신, 지아가 팔짱을 끼면서 누군가의 오빠를 질타했다. 그 누군가, 홀로 남은 동생인 리리는 내 옆에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가방을 끌어안고 있었다.
“저, 오빠는 오늘 상하이에 갔어요.”
“상하이? 왜?”
리리의 오빠, 후잉(胡永)이 상하이에 간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다. 이제 생각나서 문제지만.
“부모님이 상하이에 계셔서 만나러 간대.”
“뭐야, 그렇다고 동생만 남겨두고 혼자 가버렸어? 와, 못됐다.”
“제가 비행기를 못 타거든요. 멀미가 나서…….”
여기서 ‘기차 타면 되잖아?’라고 묻는 순진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중국에 고속철도망이 거미줄처럼 깔렸다 해도, 단동에서 상하이까지는 열차로 최소 7시간이 걸린다. 도착해서 부모님을 만나자마자 되돌아와야 할 기세다.
“그럼 우리가 괜히 붙잡아뒀던 거 아냐? 동기도 없는데 안 심심했어?”
“괜찮아요. 재미있었어요.”
아직 정식 입부도 하지 않은 채, 4촌 오빠를 따라 얼떨결에 합류한 - 그리고 그 오빠는 도망쳐버린 - 토요일 놀자판이었지만 웃는 모습을 보니 나름 재미는 있었던 모양이다. 고등학생 생활 2년차인 나도 이렇게 놀아본 적은 없는데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이 아이는 오죽할까나.
“야, 우린 이제 가봐야겠다.”
“내일 보자!”
일요일에도 너희들 얼굴을 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일일이 ‘내일’을 ‘내일모레’로 정정해주며 손을 흔들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보나마나 211번 버스를 타러 갈 두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 지아 쪽을 돌아보았다. 가게 안으로 돌아가 언니와 ‘형부’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려나.
“야! 태허야!”
“왜!”
조용히 돌아갈까 싶었던 녀석들이 10발짝도 안 가서 나를 불러댔다.
“넌 안 가냐?”
평소대로라면 나도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211번을 타고 용성동 쪽으로 가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오늘은 부탁받은 일이 있어서 집에는 좀 늦게 들어 가봐야 한다.
“얘 좀 바래다주고 가려고.”
내 오른손 엄지가 가리킨 것은 그 부탁의 대상인 리리였다.
“오호~! 이태허씨, 벌써 새내기 낚는 거냐?”
“친구 부재중에 친구의 여동생을 바래다준다, 이거 보통 이벤트가 아닌데?”
“단동 들어가면 차 끊길 텐데, 어쩌려고?”
“아냐 이것들아!”
바로 네 녀석들이 못 미덥다고 후 씨가 일부러 내게 신신당부를 하며 맡겨놓은 동생이란 말이다!
말도 안 되는 농담으로 사람 속 긁어놓는 녀석들을 향해 배워본 적은 없는 이단옆차기를 날리자 녀석들은 언제 그런 여유가 있었냐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평서대 후문의 버스정류장을 향해 치달렸다. 하여간 참으로 다루기 쉬운 녀석들이란 말이지. 어쩜 그 다루기 쉬운 점이 고등학교 와서도 별반 달라지는 게 없는지 참 신기했다.
더 다루기 쉬운 남자의 동생이 여기서 키득거리며 웃고 있지만.
“으, 왜 웃어?”
“음, 아니, 아니에요.”
그렇게 이상한 폼이었을까.
“뭐야, 무무민민은 벌써 가버렸어?”
잠시 가게 안에 들어가 붉은 가디건을 걸치고 나온 지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무무민민이란 무호와 상민이를 통칭해 부르는 말인데 그런 별명이 붙은 건 순전히 후잉 녀석 때문이다. 중국에서 외자 이름 부르는 방식 - 그러니까, 보통 ‘잉잉’이라 부른다. - 이 동아리에 퍼져 다들 비슷한 방식으로 별명이 하나씩 붙어버린 것이다. 참고로 내 별명은 ‘태태’고 지아의 별명은 치사하게도 성을 써서 ‘유유’다. 지아의 별명을 보면 알겠지만, 이 재미 하나도 없는 별명을 지어 붙인 건 순전히 유지아씨다.
남자만 넷인 동아리에 홍일점으로 눌러앉아 있는 것만 봐도 보통 감성은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긴 하지만 말이지.
“넌 어떻게 할 거냐?”
“나? 언니랑 형부가 칵테일 마시자고 해서, 따라가려고.”
후배 앞에서 참 좋은 거 가르쳐준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봐?”
“칵테일이라는 거……. 술, 아니에요?”
그러게 말이다. 칵테일이라는 단어를 듣고 그것이 고등학생도 즐길 수 있는 건전한 기호식품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요새 무알콜 칵테일 많거든? 평서대 앞에만 무알콜 전문 가게가 둘이나 있단 말야!”
여자애들이란 참으로 모르는 게 없구나. 요새 교실에서 여자애들이 칵테일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던데 그게 이거였나. 그런데 왜 물어본 건 리리인데 화는 내가 받는 걸까.
“어쨌든, 리리는 터미널 가야겠네?”
“네. 저, 오늘 고맙습니다. 월요일에 학교에서 뵐게요.”
“호오, 그럼 동아리방에서 보자? 태태, 애 잘 데려다 줘?”
“알았어.”
오늘 처음 본 애를 벌써부터 부원 취급이라니, 독종도 이런 독종이 없다.
그 악랄한 아가씨를 향해 손을 흔들며, 나는 리리와 함께 평서대 후문으로 향했다.
의주역 인근에서 단동으로 가는 버스는 모두 시외버스 아니면 좌석버스들뿐이다. 신의주역이나 황금평, 비단에서는 시내버스가 국경을 넘어 단동까지 들어가기는 하지만(신의주역에서는 전철도 들어간다), 리리의 집이 있는 단동 신시가지, 랑터우는 그 세 곳 모두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 동네에서 단동행이 시외버스나 좌석버스밖에 없는 것은 순전히 압록강대교가 유료도로인 탓이다. 더러운 중국 놈들. 아, 미안 리리. 너 두고 하는 말은 아니야. 네 오빠는 포함되지만.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다 보니, 승차할 수 있는 곳은 제한되어 있다. 버스가 출발하는 의주역전 터미널이라든가, 평서대 정문 정류장이라든가. 의주역전 터미널에서 출발해 압록강대교를 넘는 버스들은 터미널과 대교 거리가 가까운 탓에 중간에 정차하는 곳이 없다. 대신에 용암포와 비단에서 각각 15분 간격으로 다니는 버스는 평서대 정문에도 정차한다. 여담이지만 의주역전에서 출발해 평서대에 서는 단동행 버스는 두 개가 있는데 둘 다 황금평을 거쳐 하나는 단동역으로, 하나는 동강으로 들어가니 랑터우에 사는 리리로써는 있으나마나 한 버스다.
“으아, 사람 많네.”
“서서 가야겠네요.”
시할구와 동강을 합해 인구 300만의 대도시로 성장한 강 건너 단동이지만, 종합대학은 아직도 3개에 불과했다. 한국도 사립대 설립요건이 많이 까다로워졌지만, 중국은 아예 사립대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이 컸다. 단동 내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은 거리가 먼 선양보다 버스 타고 통학 가능한 의주로 진학하는 길을 택하고 있었다.
대학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는 더 심해서, 인구 300만의 단동 특별행정구 내 일반계 고등학교 신입생 정원은 2만 명을 못 넘기고 있었다. 후 씨와 리리가 그렇듯이 고등학생들 중에도 의주로 진학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었다. 특히 잘 사는 집일수록 아예 의주로 진학시키려 한다는 모양이다. 의주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기 편하다고. 이것도 단동이 일국양제 수준의 특별행정구로 지정되어 있어서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결과, 단동으로 들어가는 버스들은 저녁시간대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단동으로 돌아가는 중국인 학생들과 회사원들로 북적거린다.
“차라리 터미널로 갈래?”
역전 터미널에서는 5분에 한 대씩 단동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출발한다. 여기에서 시내버스로 15분 정도 가야 하긴 하지만 자리는 확실하게 잡을 수 있었다.
“괜찮아요. 다리 건너면 바로 시내버스로 갈아타니까요. 아, 왔어요.”
리리가 고개를 저은 것과 동시에, 남쪽에서 용암포발 1102번 좌석버스가 나타났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창밖으로 삐져나온 버스 실내는 중국 가는 버스답게 시커먼 머리와 머리와 머리와 머리들만이 가득 차 있었다. 저 안에서 자리를 하나라도 잡는다면 그야말로 신의 가호를 받았다고 할 수밖에.
“저, 그럼……. 어?”
“응?”
내 쪽을 돌아보고 웃으며 손을 가방에 찔러 넣던 리리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왜?”
“이상하다…….”
어깨에 멘 가방 속에서, 리리의 손이 부산하게 내용물을 찾아 헤멘다. 중국어로 뭐라고 혼자 중얼대는데 심각한 상황 같았다.
“왜 없지? 있어야 하는데…….”
“무슨 일인데? 설마…….”
뭐가 없기에 이렇게 당황하는 것일까.
답은 뻔했다.
“지갑이 없어요.”
“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심각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끝장, 이라는 단어를 써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지갑에 ‘다’ 들어있지?”
“네. 학생증도 거기 있는데…….”
그러면 돈 빌려줄 테니 타고 가라, 라는 식의, 의주 여자애들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은 이 아이에게는 할 수 없었다. 단동 애들이 딱히 남의 신세를 지기 싫어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학생증 없으면 버스 못 타는데…….”
그렇다. 이 문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단동 들어가는 버스를 탄다는 것은 국경을 넘는다는 이야기다. 단동특별행정구와 의주광역시는 무비자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여권만으로도 양 지역을 넘어 다닐 수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여권이 필요하다’는 말도 된다. 그렇다고 매일같이 버스나 전철 안에서 여권 소지 여부를 검사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여권 연동 교통카드다. 한국인이야 대한민국 여권만 있으면 단동 들어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일단 단동행정구계 내에 입경하는 데서부터 단동입경비자가 필요하고, 단동과 의주를 마음대로 넘어 다니려면 다시 단동행정구민으로 등록해(이게 장난 아니라더라) 단동 여권을 별도로 발급받아야 한다. 이 단동 여권을 교통카드와 연동시켜 버스나 전철에 탑승하는 것만으로도 여권 소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국경을 넘어 다니는 버스들은 현재 일체의 현금 승차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리리 같은 통학생들의 경우는 이 여권과 교통카드 기능을 학생증에 부여해 국경을 넘어 통학하기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학생증, 그리고 학생증이 들어있는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곧 집에 갈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 생각해 봐. 지갑 어디서 잃어버렸어?”
“어, 그러니까…….”
생각해보니, 이 애가 지갑 꺼낼 일이 없었다. 학교에서 평서대까지는 걸어서 이동했고, 평서대 앞에서는 죄다 우리 2학년들이 돈을 내거나 지아의 언니가 공짜로 먹여주었으니까.
“학교 이후로, 지갑을 꺼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음…….”
학교에 올 때야 지갑 없이는 못 왔을 테고.
“일단, 학교부터 가 보자.”
“지금 열렸을까요? 벌써 10시인데…….”
“별 수 없지.”
1102번은 벌써 뒷문이 터져나갈 정도로 승객을 태우고 압록강대교 방면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자정이 되면 압록강을 넘는 모든 버스와 전철의 운행이 끊긴다.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평서대에서 랑터우로 넘어가는 마지막 버스는 11시 20분의 비단발 1113번 버스. 의주역전에서는 11시 40분에 막차가 출발한다. 아, 단동시내버스들은 10시면 끝나는구나.
그 전에는 일을 끝내야 한다.
우리 학교 - 교천고등학교는 뭐라고나 할까, 인터넷에도 소개되고 전국구 공중파 TV에까지 나온, 참으로 애매하기 짝이 없는 입지를 자랑(?)하고 있다.
1호선 평서대역과 3호선(이래봤자 노면전차지만) 용성공원역 사이에는 가로세로 1km씩 되는 정사각형 모양의 용성공원이 있다. 우리 학교는 그 공원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그냥 자리 잡은 것도 아니고, 마치 해자를 낀 성 마냥 호수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는 것이 우리 학교다. 의주 할머니들은 흔히 ‘공원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말로만 들으면, 아니 그냥 외부에서 보면 참 멋있기 그지 없는 학교다. 개교 6년째인 이 학교를 배경으로 영화나 드라마, CF도 몇 편이나 찍었다. 하지만 직접 다니는 나로서는 그저 죽을 맛이다. 아침마다 5분을 걸어서 공원 입구에 닿은 뒤에 다시 5분 이상 공원을 가로질러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 그래도 난 걸어서 다닐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할까 - 문구점이라든가 분식집이라든가, 가장 가까운 상업시설은 역시 무조건 5분 이상 걸어서 공원을 빠져나가야 만날 수 있다.
사립학교라면 모를까 공립학교를 지으면서, 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부지를 누가 선정한 걸까. 아, 학부모들은 애들이 딴 짓 안하고 공부만 할 수 있겠다고 좋아한다마는. 한 번 댁의 아드님들이 담 넘다가 호수에 빠져서 폐렴 걸려봐야 그 소리를 못하시겠지.
“열려 있어서 다행이네.”
정문을 지나면서, 리리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약 교문이 닫혀 있었다면 리리가 보는 앞에서 담장을 넘느라 참 볼썽사나운 꼴을 당했을 테다. 운 나쁘면 바로 내가 호수에 빠져 폐렴 걸린 사례자가 될 테고. 입지가 이러니 흔히 말하는 지각생들의 개구멍이라든가 하는 것조차 없다.
“한국은 학교 문을 닫나요?”
으앗, 들었나보다.
“할아버지 할머니 시절엔 수업 끝나면 교문을 닫았다고 하더라고.”
“그럼 야간자율학습은요?”
“그걸 막았다던가.”
요즘은 기숙사제 학교나 몇몇 유별난 사립학교가 아니고서야 야간자율학습은 말 그대로 야간자율학습이다. 보통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정도다. 그나마도 우리 학교는 북문다리만 건너면 공원 안에 시립도서관이 있으니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는 인간들은 어지간히 만사가 귀찮거나 한적한 학교 도서관 안에서 애인이랑 염장을 지르려 하거나 도서부 학생에게 관심이 있다는 인증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밤 10시까지 교실에 학생들을 강제로 잡아두고 ‘자습’을 시켰다나. 그런데 할아버지 시절에는 정부에서 야간자율학습도 과외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니 내가 애 낳을 때면 또 강제학습이 부활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북조선에서는요?”
“엄마 말로는 그런 건 없었다고 하던데.”
통일 되었을 당시에 아버지는 의정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여기 신의주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나. 원래 고등중학교를 다니고 있어야 했는데 학교에서 워낙 내라는 게 많아서 아예 나가지를 않았다고 들었다. 얼마 되지 않은 고등중학교 시절에도 툭하면 시장 나가느라 수업을 빼먹었다고 하니 말 다 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별 문제 없이 학교를 다녔는데 역시 그 시절에도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 남겨서 공부를 시키진 않았다고 들었다.
“저, 学长.”
“응?”
리리가 살짝 내 코트 자락을 잡아당기며 나를 불렀다. 의주에 살면 좋든 싫든 웬만한 중국어는 못 알아들을 수가 없다. ‘선배’정도로 부른 모양이다.
사실 중국인 후배들이 말 놓는 정도는 문화가 그런 거니까 이해하고 넘어가라고 선생님들이나 선배들로부터도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들끼리도 나름 각오를 하고 있었건만,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는 중국인 후배가 이렇게 깍듯해서는 내가 더 당황스럽다.
“왜?”
“学长은, 여기서 태어났나요?”
“응. 예전엔 여기가 아니라 남민동에서 살았지만. 아, 그리고 말야…….”
“네?”
이미 우리들은 교문에서 본관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끝을 앞두고 있었다.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들어가 30m만 더 걸으면 동아리방이 있는 학생회관이다.
이 말을 해도 될까.
그 30m를 걸으면서 시간 때울 주제로는 적절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 처음 만난 여자애한테 던질 이야기로는 뭔가 무례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 일도 아니라 하기에는, 리리가 빤히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어쩌겠어.
“그, 선배라고 부르면 조금 딱딱해보여서.”
“아, 저, 그게…….”
오빠나 형이라는 호칭은 집에서도 듣고 친척끼리 모이면 무수히 들으니 괜찮지만, 선배라는 호칭은 초등학교 주번 시절에도 들어본 적 없었다. 중학생 때에도 학년을 넘어 활동하는 동아리 같은 건 없었고.
“한국에선, ‘선배’라고 해야 한다고 해서요. ‘오빠’라고 부르는 건 남자친구한테만 한다고…….”
“누가?”
대체 누가 그런 왜곡된 정보를 가르쳐 주는 거야. 하여간 인터넷이란.
“哥哥가요.”
“뭐! 잉잉?”
“네.”
잉잉 이 녀석! 동생을 혼자 내버려 둔 것으로도 모자라서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는 자기가 여자 친구라도 있으면 내가 말을 안 하겠다!
“그거 말고 한국에 대해서 말해준 거 뭐 없어?”
“음, 한국에선 地铁 탈 때 신발 벗고 타야 한다든가…….”
이건 대체 언제 적 개그냐! 어쩐지 아까 평서대 가면서 지하철역 지나가는데 애 표정이 이상하더라.
“한국 도서관에는 자기 책 절대로 못 가지고 들어간다고…….”
이 녀석, 앞으로 시립도서관에 자기 책 한 권이라도 가지고 들어가기만 해 봐라.
“월요일에 학교 오면, 잉잉이 지금까지 말한 거 한 번 쫙 적어와 봐.”
어쩐지 나조차 유지아 씨의 뒤를 걷는 듯 하는 기분이 들지만, 하나뿐인 강 건너 사는 친구가 귀여운 동생에게 이 이상의 죄를 짓는 것을 가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 지하철 타면서 신발 벗고 들어갔으면 대체 누구 망신이냐고!
“잉잉이 말한 건 믿지 말고.”
“거짓말인가요?”
“당연하잖아. 어느 나라에서 지하철을 신발 벗고 타겠냐.”
이 아이가 순진한 것인지, 정말 강 건너에서 한국에 대해 정보를 찾을 수단이 부족한 것인지 참 궁금해졌다. 하긴 단동에서 의주로 출퇴근 하는 사람은 많아도 의주에서 단동으로 출퇴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유지아씨, 빨리 만나고 싶어. 우리 동아리의 다음 활동주제는 이미 정해졌어. 생각난 김에 카톡 문자나 보내볼까.
“그러니까, 오빠라고 불러.”
“네, 学长!”
이건 뭐, 우리 말 놓을까요? - 네, 그래요. - 그럼, 편하게 하세요. - 네, 먼저…….도 아니고.
호칭 문제야 앞으로 차차 고쳐나가면 되겠지. 조급하게 굴 건 없다. 목숨이 달린 문제도 아니고.
-철컥!
진짜 문제는 이쪽이다.
“잠겼네요.”
“그러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학생회관의 문은 잠겨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현관 옆의 단말기에 학생증 카드를 접촉시켰지만 “출입할 수 없습니다.”라는 냉랭한 음성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이거 참.”
‘어쩔 수 없지’ 하며 고개를 흔들고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창문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아리방은 3층이다. 내게 야마카시 같은 취미는 없다. 관리실 경비 아저씨를 만나려면 교문까지 가야 하려나.
일단은 어떻게든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는지를 찾아 본 다음에 관리실을 찾아도 늦지는 않겠지. 설마.
1. 이 소설은 고증 개무시, 막가파적 구성을 가진 대체역사라 부르기도 뭣하고 판타지라 부르기도 뭣한 그냥 잡설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지는 겁니다.
2. 거기다가 군대에서 구상한거라 정말 대중이 없습니다.
3. 쪼가리입니다.
4. 그래도 에러는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지 말입니다.
1. 이 소설은 고증 개무시, 막가파적 구성을 가진 대체역사라 부르기도 뭣하고 판타지라 부르기도 뭣한 그냥 잡설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지는 겁니다.
2. 거기다가 군대에서 구상한거라 정말 대중이 없습니다.
3. 쪼가리입니다.
4. 그래도 에러는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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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rary of Highness】
Episode. 땅 위의 조공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등화관제중이니 허리에 매어놓은 작은 손전등을 잠깐 비춰보는 수밖에 없었다. 23:29.
“쯧, 하필이면 일요일 목전에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끌고 나온 건 함장 자신이다. 함대 사령부에서도, 작전사령부에서도, 화원함에게 이 오밤중에 동사군도로 출동하라고 강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이 시간에 맞춰 동사군도로 보내달라고 조른 건 함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대놓고 할 수는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출동은 ‘원수부’에서 직접 명령한 것이다. 출동 당시에야 간만에 연습이 아닌 실전 긴급출항이니 다들 흥분에 들떠 무슨 말도 할 생각이 안 들었겠지만, 무려 30시간동안 500마일을 달려 온 지금 수병들이나 수교들이 뭐라 불퉁거리고 있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부장, 상륙조 준비는?”
“완료했습니다.”
“잘 골랐지?”
“포갑에서 정예요원만 골라서 뽑았습니다.”
강현 자신이 직접 명해서 부장이 선발하고 훈련시킨 단정 상륙조 요원들이다. 부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긴 이 배에서 정예 아닌 이가 누가 있으랴. 3함대의 모든 사람들이 한 입으로 이젠 답 없는 꼴통이라 결론 내린 인간들을 함께 먹고 함께 자며 사람 만들어 놨는데 정예가 아니라면 그냥 옷 벗고 물고기나 잡으며 남은 생애를 보내야 할 판이다.
-좌현 견시보고! 선박 한 척! 방위 320! 거리 3천! 본함으로 접근 중! 불빛 보이지 않음!
“왔나?”
반가워하기엔 아직 일렀다. 이 해역에 나타날 수 있는 배는 많다. 몇 년 전과 달리 이 인근에 ‘해군’ 혹은 ‘수군’의 깃발을 단 함대가 부쩍 늘어난 것이다. 필리핀의 미군은 북쪽에서 나타날 일이 전혀 없으니 차치하고, 푸저우에서 출항한 민국(閩國)군이나 푸둥에서 출항한 상하이군 함정일 가능성이 있었다. 운 없으면 제발 만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일본군일지도 모른다.
쌍안경을 들어 좌현 견시수가 말한 방향을 살폈지만, 음력 29일 밤에 탐조등 하나 켜지 않은 채로 3천 야드 밖의 선박을 확인한다는 것은 사람 눈알 빼놓기 십상인 일이었다. 아무리 시력 6.0이라 해도 밤이 되면 별 도리가 없었다. 희끄무레하게 형체를 파악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저 견시 녀석은 살쾡이 눈인 모양이다.
“함장님, 접근합니까?”
“아쉬우면 지들이 어떻게든 하겠지.”
탐조등을 켤 수도 없고, 대공방송을 실시할 수도 없었다. 나하경찰서의 순시선은 화원함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대편 해안에서 대기 중일 것이다. 혹시나 여기에서 무슨 소란이라도 일어난다면, 히라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서둘러 일을 끝마치고 철수를 시도할 것이다.
류큐에 배치된 일본 경찰의 순시선들 중 큰 것들이 해봐야 1000톤도 안 된다지만 월국 해군 쪽도은 가장 큰 배가 그 정도인 판이니, 만일 일이 터진다면 월국군은 제쳐두고 화원함 단독으로 억류를 하든 추격을 하든 해야 할 판이다. 물론 지금 나타난 함정이 화원함에게 호의적인 행동을 보이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또 단독으로 일본 경찰 함정을 정선시킬 경우 외교적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도 예측할 수 없다. 즉, 함장 강현은 도박을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좌현 1번, 함번 보여?”
-에,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함장의 질문에 바로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하기는 껄끄러웠던지, 견시수는 잠시 시간을 두고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를 해 왔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함장은 곧 손가락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툭툭 쳤다. 월국 해군 함정들은 함번을 붙이지 않고 함수에 함명을 직접 써 넣는다. 저 수병이 못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좌현 견시보고! 선박 한 척! 방위 320! 거리 2천! 본함으로 접근 중! 함명 파악 불가!
견시 서는 녀석이 한자를 읽을 줄 알긴 아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그냥 맡겨두기로 했다. 어차피 월국 해군 함정들의 함명은 그리 어려운 한자를 쓰진 않으니까. 설마 建 정도의 한자도 못 읽지는 않으리라.
-함교, 통신실!
“함교, 이상.”
음력전화기 수화부에서 통신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통신실의 보고만 기다리고 있던 강현으로써는 큰소리 안 낸 것이 용한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월국 해군 함정과 교신이 되었습니다.
“좋아!”
입이 찢어지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지난 작전사 전투력경연대회 때 최우수함으로 선정되었을 땐 이어제도가 떠나가도록 웃어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괜히 미친놈으로 보일 필요는 없었다.
-여기는 대월민국 해군 긴팽(建坪)함. 대한국 해군 화원함, 감도 있습니까?
“대한국 수군 GS-962 화원함, 감도 양호. 화원함장 참령 강현입니다.”
-긴팽함장 소교 워시우쾅(岳燒曠)입니다. 반갑습니다.
명색이 영유권을 선포한 주권국가이면서, 정작 이 해역에 군함 한 척 파견해본 것이 오늘이 처음인 월국었다.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반가움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좌현 윙브릿지에서 견시수가 상대 함정이 마스트에 월국 국기를 내건 건평(建坪)함이라는 보고를 해왔다. 쌍안경을 들어 눈에 대니 어두운 와중에도 삼각형이 박힌 모양의 월국 국기가 보였다. 거짓말 안 하고 그냥 삼각형 하나 그려져 있다. 저 국기 대체 누가 도안한건지 아마 동아시아에서 가장 못생긴 국기가 아닐까 싶었다. 히노마루가 매우 철학적이고 심오한 뜻을 내포한 걸작으로 보일 지경이다.
측심을 지시한 강현은 함교에 펼쳐놓은 해도를 회중전등 불빛에 살짝 비춰보았다. 원남해에서 그나마 가장 비슷한 환경을 찾아 지난 1주일 간 이 지도만 지겹게 들여다보며 열심히 연습해왔다. 묘박지로 미리 눈여겨 봐 둔 지역을 손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을 때, 측심수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31피트에 뻘.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00도 3노트.”
“00도 3노트!”
손전등에 살짝 시계를 비춰보았다. 23:4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잠시 후면 작전 개시 15분 전이다.
“정지.”
“양현 정지!”
엔진이 멈췄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는 엔진을 멈춘다고 해서 배가 멈추지는 않는다. 파도가 끊임없이 배를 좌우로 흔들고, 해류가 엔진과는 상관없이 무거운 쇳덩어리를 둥실둥실 실어 내간다. 그렇기 때문에 원하는 자리에 왔다 싶을 때 최대한 빨리 배를 원하는 자리에 묶어두어야 한다.
“우현 투묘.”
언제나 하던 것처럼 강현이 손가락을 빙글 돌리며 지시를 내리자, 조타장이 음력전화기를 통해 투묘 지시를 하달했다. 다른 때라면 구령을 외치는 수병들의 목소리로 떠나갈 듯이 시끄러운 소리가 함교에까지 가득 들리겠지만, 등화도 끈 판국에 큰 소리는 얼토당토않은 일이었다. 쌍안경을 들어 남위탄(南位灘) 인근을 살폈다. 아직 섬 반대편에서는 환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쌍안경을 내리고 함교 방풍창 너머로 함수갑판을 내다보았다. 함수요원들 중에 이병이 세 명이던가. 그 중 한 명은 야간 훈련을 두 번 치러봤지만, 나머지 두 명이 걱정이었다. 갑판교와 고참 수병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함장이 이렇게 걱정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병들은 선임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윈드라스를 조작하거나 대기하거나 하고 있었다. 거대한 쇠사슬이 술술 풀려나가는 것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파도가 높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앵커 착저했습니다.”
역시 음력전화기를 착용하고 있던 부장의 보고를 들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와 남위탄 해안 사이의 거리를 눈으로 재었다. 모터로 구동되는 단정으로 상륙한다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잘되고 있다.
“양현 뒤로 하나.”
“양현 뒤로 하나!”
‘우우웅’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검은 바다에 하얀 줄이 한 가닥 그어졌다. 이 쯤 되면 일본 경찰의 움직임보다는 함수 요원들의 안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할 때다. 한 사람이라도 바다에 빠진다면 - 혹시 운이 나빠서 건지지도 못한다면 - 참령에서 군 생활 끝장나는 건 둘째 치고 수병들 휴가도 통째로 정지되는 수가 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군인 퇴직금이 어떻게 되더라. 계속 알아본다, 알아본다 하다가 여태 이러고 있었다. 한숨을 얕게 내쉴 때, ‘두웅!’하는 얕은 충격이 바닥에서 시작해 온 몸을 흔들었다.
“양현 정지.”
“양현 정지!”
별 잡생각만 하다 보니 묘박은 금방 끝나버렸다. 어차피 자신이 한 건 거의 없이 부장과 조타장이 알아서 한 작업이긴 하지만.
“갔다오지.”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필승!”
“필승!”
부장을 선두로 함교 요원들이 일제히 강현을 향해 거수경례를 올렸다. 가볍게 답례를 해 준 함장은 함교에서 조타실로 내려가면서 허리에 매어놓은 회중시계를 꺼내 열어보았다. 23:59:46. 잠시 후면 새로운 음력 1일이 시작된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만난다.
◉ ◉ ◉
동굴 안은 넓었다. 얼핏 보자마자 동사군도에 딸린 작은 섬의 바위동굴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 정도였다. 어느 정도냐 하면, 경찰 1개 소대가 우글거리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지 않을 정도였다.
저놈의 경찰 1개 소대.
“이렇게 마주치진 않길 바랬습니다만.”
도서관에서도 호시탐탐 담배 꼬나물 기회를 노리는 인간이, 뭐라 할 사람도 없는 무인도에서 담배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나하경찰서 고등계장 히라타 야시치로 경부보가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맛깔나게 빤 뒤 연기를 훅 내뿜자, 등 뒤에서 박화원이 쿨럭쿨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지유야 담배 냄새는 물론이고 그보다 더 지독한 냄새도 지겹도록 맡아봤으니 대번에 기침 내뱉지는 않았다. 다만 이 자리에서 일행 중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 약간 짜증이 날 뿐이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마주치자고 부임한 건데요?”
오빠라면 이보다는 훨씬 조롱조로 맞받아쳐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당장 머릿속에서 조합할 수 있는 최대치는 이 정도였다. 다른 땐 술술 잘만 나오던 한국말이 갑자기 회로 어디에 불량이라도 생긴 것인지 단편적인 몇 가지 단어만 찔끔찔끔 새어나오고 있었다. 히라타는 어깨와 허리를 펴고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시선을 아래로 내려서 성지유와 눈을 마주쳤다. 눈빛도, 입 모양도, 모두 ‘호오?’라는 소리를 내려 하고 있었다.
재수 없어.
살아가면서 시집이란 걸 가게 된다고 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남자의 아내는 되지 않을 것이다.
시집을 가게 된다면, 이지만.
“이렇게 마주치는 건 전임자로 족한데 말입니다.”
“괜히 후임으로 온 게 아니거든요.”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려 하니, 남쪽이라고는 하지만 2월 겨울바람에 시달린 얼굴 가죽이 움직이기 싫다며 주저앉아 저항했다. 웃는 것도 안 된다, 담배 한 방에 기침 내뱉는다, 병력 수는 압도적으로(라기보다는 처참할 정도로) 밀린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도 박화원도 모두 강제추방 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눈물 나는 상황이라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려나.
“좋게좋게 넘어갑시다, 세이(成) 참령. 그쪽이나 이쪽이나, 피차 충돌해서 좋을 건 없는 상황이니까.”
“어머, 우리 전임자한테 책이란 책은 다 뺏기셨다는 분께서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이번 책은 반드시 가져갈 수 있다고 꿈에서 조상님이 점지라도 해 주셨나 보죠?”
“지유 씨.”
옆에서 박화원이 살짝 어깨를 붙잡았지만, 이미 말은 내뱉었고, 성지유의 이죽거림에 히라타는 태우던 담배의 필터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도발이 먹히긴 먹힌 모양인데, 그 다음에 뭘 해야 할지는 감이 안 잡혔다. 이럴 바엔 차라리 안 먹히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동굴 안은 시원한데 왜 등에서는 땀이 배어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군요.”
시간을 돌려버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한 가지 일은 확실히 해야겠죠. 하시모토 군.”
“넷.”
“저 후레이큐진(不令球人)들을 체포해.”
으악, 이라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히라타의 뒤에 서 있던 하시모토 순사부장이 손가락 관절을 두둑 꺾으며 뒤에 서 있던 순사 몇 명을 데리고 성지유 일행을 향해 다가오려 했다. 잠깐 고개를 돌리니 유이는 카스카를 꼭 붙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카스카는 아직 왼쪽 어깨가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였다.
“정정당당하게 하죠, 계장.”
“물론.”
고개를 끄덕인 히라타는 잘근잘근 씹어대던 담배를 침과 함께 바닥에 뱉어버리고는 아직 남아있는 불씨를 구둣발로 밟아 껐다. 미간에 주름이 지고 있었다. 일본 경찰들은 경찰학교에서 최소한의 개념도 안 배우고 나오는 것인가. 이래서 이 땅은 일본 땅이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땅은 일본 땅이라면서요? 그럼 류큐인들이 여기까지 자국 주재 외국 외교관들을 안내해줘도 별 문제는 없을 텐데? 역시 여기는 ‘외국’ 영토였나 보죠?”
“하시모토 군!”
갑자기 이름을 불린 하시모토가 살짝 불만이 섞인 표정을 담아 히라타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상관이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순사들은 결국 더 이상 어떠한 항변도 없이 그대로 네 명의 아가씨들에게서 물러섰다. 그런데 순사들이 물러나니 이번엔 박화원이 성지유의 팔을 꽉 붙들었다.
“지금 무슨 소리예요?”
“예? 별 상관없잖아요.”
수군 소속인 성지유에게 있어서, 이 땅을 일본령으로 생각할 것인지 월국령으로 생각할 것인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말싸움, 당장 자신에게 유리하면 그만인 법이다. 하지만 명색이 외무부 소속, 그것도 고등문관시험 출신의 5급 사무관인 박화원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상관 없다뇨! 지금 일본 공무원 앞에서 그렇게 인정해버리면 나중에…….”
“에에…….”
자신의 어깨를 붙들고 열변을 토하는 박화원을, 성지유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한참동안 상대국 공무원 앞에서 영토 관련 발언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며, 그로 인해 어떤 후폭풍이 돌아올 수 있는지를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열심히 설명하던 박화원은 성지유와 유이와 카스카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깨닫고는 순간 당황해서 오른손으로 목 뒤를 부여잡았다. 유이와 카스카는 이 아가씨가 한국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서 쳐다 볼 뿐이었지만.
“언니, 우리 오빠한테도 이랬어요?”
“에, 에?”
이 추운 날에 박화원의 이마 한구석에 땀이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등은 젖었을까. 가슴에 두른 붕대에 땀이 차서 죽을 맛이었다.
“흠, 뭐 그런 건가.”
“네? 왜요?”
“아니요.”
곯려먹으려면 얼마든지 곯려먹을 수도 있겠지만, 장소와 타이밍이 받쳐주질 않고 있었다. 게다가 곯려먹는 데는 어쩐지 소질이 없었다. 오빠라면 강도 조절 하나도 안 된 장난을 못 이기는 척 받아줄지도 모르지만.
“잡담 끝났습니까?”
“얼추요.”
“후,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죠. 거기 비국민들 문제는 그렇다 치고, 하여간에 책은 일단 넘기시죠. 엄연히 일본령 내에서 발견된 일본의 역사 유물이니 우리 쪽에서 인수해야겠습니다.”
등 뒤에서 카스카의 주먹이 말리는 것이 느껴졌다. 주먹 쥘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비국민이라니. 이제 20대 초반, 10대 후반인 아가씨들에게 일본 사회 최악의 낙인을 찍어버리다니. 게다가 언제 류큐사를 그렇게 소중히 다뤘다고.
“참아.”
“으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박화원도, 유이도, 카스카도.
다들 돌아갈 사람들이다.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자면 조금이라도 꼬투리를 잡히면 안 된다. 참아야 한다.
“어떻게 못 하는 거예요?”
뒤에서 박화원이 물었다. 성지유의 고개가 점점 내려갔다. 박화원은 지금, 자신과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왠지 지금 자신의 꼴이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언니. 오빠는 이럴 때 어떻게 했는지 알아요?”
나하의 무관이 된 이후로 몇 번이나 자기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
“그건…….”
성지유의 질문을 받은 박화원은 일단 한숨부터 내쉬고 있었다. 본 적이 없는 것일까, 보긴 봤는데 설명하기가 힘든 것일까. 자신이 아는 강현의 성격대로라면 아마 후자가 아닐까 싶었다. 원남해에서 벌였던 수많은 전투마다 강현은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적을 속이고 승리했으니까.
속인 것일까.
아니면 정면으로 돌파한 것일까.
치마 위에 맨 벨트를 왼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가지고 있는 것은 제10호 권총 한 자루와 벨트에 띠돈으로 맨 환도 한 자루. 권총은 그렇다 쳐도 환도는 2무교 동기들이 키가 (상대적으로)작은 자신을 배려한다고 사 준 것이 고작 1척 6촌짜리라 히라타와 1:1 일기토로 승부를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설령 더 긴 칼이 있어도 별 소용은 없을 것이다. 대한국 수군 제2무관학교 특임과정에서는 검술을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벨트를 쭉 손가락으로 훑다가, 어깨에 멘 가방의 끈이 걸렸다. 가방 안에는 상통보록과 두 개의 권총 탄창이 들어 있다. 히라타가 그토록 원하는, 이 책을 넘겨준다면 히라타의 반응은 어떨까. 등 뒤에 있는 세 명의 아가씨를 - 아니, 박화원은 한국인이니 제쳐두고 - 가만히 놓아둘까? 식민지 공안사회에서 한 번 경찰의 눈 밖에 난 식민지인들이 과연 앞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지는 그 다음에 걱정할 일이다.
이판사판인가.
왼쪽 가슴에 매단 훈장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짧은 삶을 살면서 최악의 밑바닥을 경험하고도 지금의 이 자리까지 기어 올라온 증표.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 준 오빠의 뒤를 이어, 성지유, 자신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언니, 가방에서 책 꺼내 봐요.”
“예? 괜찮겠어요?”
“시험해볼 게 있어요.”
분명히, 이 책은 자신들이 찾고 있는 ‘무언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하지만 히라타 야시치로는, 그리고 일본 해군과 나하 경찰은, 자신보다 한 발 앞서 이 책을 손에 넣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이 탄 배를 쫓아 이 섬으로 들어왔다.
아직 책의 모든 내용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얼핏 스쳐지나갔다고 하기에는 뇌리에 언뜻언뜻 남아있는 장면이 있었다.
“무관님, 가능하시겠어요?”
“네?”
계속 히라타를 주시하고 있던 시선이 순간 유이에게로 돌아가 버렸다. 카스카와 박화원, 그리고 유이까지 세 처녀가 서로 뭔가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마 세 사람 모두, 강현의 조력자들로 강현이 나하에서 어떻게 일을 처리해나가는지를 지켜봤을 것이다.
강현은 분명, 이런 상황을 겪어봤고, 또 이런 상황을 헤쳐나간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지금 자신의 행동과 비슷하기도 했다.
짧은 순간을 이용해 그런 결론을 내렸다. 이제 확인을 위해 히라타를 한 번 찔러 볼 차례였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죠. 내가 여기서 책을 주면, 우리가 계장한테 얻을 수 있는 건 뭐죠?”
“무사히 나하에 돌아가야죠. 눈도 시뻘건데, 많이 피곤하지 않습니까, 성 참령?”
“크으…….”
정곡을 찔렸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한국소학교 유치원에 다녀온 이후 요 며칠간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던 터였다. 아마 충혈 되어 있을 눈이 지끈거렸다. 등 뒤에서 박화원이 책을 꺼내든 채 히라타를 노려보고 있었다.
노려볼 것 없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잘못이다.
그 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켜냈어야 했다. 끌어안고, 다시 그 지옥 같은 땅에 떨어져 흙땅을 박박 기는 한이 있어도 자신의 품 안에서 지켜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해 받는 벌이니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하면 안 된다.
“여기, 이거 맞죠?”
더 이상 길게 끌었다간 체력 고갈로 하고 싶은 말도 못 한 채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책을 산호 바닥에 내던졌다. 좌우를 살피던 히라타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책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왼손이 다시 벨트 위를 쓰다듬었다. 당장이라도 칼집을 쥐고 칼자루를 앞으로 내밀고 싶은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아…….”
뒤에서 박화원이 손을 뻗어 성지유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부드러운 손, 아마 손에 물을 묻힐 일은 세수 외엔 없을 것만 같은 손, 만두를 곱게 빚어놓은 것만 같은 손이, 흉터로 얼룩진 자신의 손목을 잡아주고 있었다.
왼손을 조용히 벨트에서 떼어내면서, 다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카스카는 계속해서 동굴 입구를 돌아보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 손을 대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혈기 왕성한 10대, 아픈 것보다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 상황에 짜증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하지만 몸이 온전하다 해도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맞군.”
책을 집어 들고 휙휙 넘겨보던 히라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단히 부족해 보이는 미소.
통쾌함도, 시원함도, 만족감도 없는 미소.
책을 가지고 무리로 돌아간 히라타를 향해 형사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뭔가를 이야기 할 뿐,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확실해졌다.
저 ‘비어있는’ 책으로 히라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역시, 강 참령이 아니면 안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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